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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스타코비치, 드미트리 드미트리 예비치 [Shostakovich, Dmitri Dmitriyevic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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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수경

저자: 정수경

등록일자 : 초기자료


쇼스타코비치, 드미트리 드미트리 예비치 [Shostakovich, Dmitri Dmitriyevich]


쇼스타코비치 (Dmitri Dmitrijewitsch Schostakowitsch 1906.9.25-1975.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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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

 

러시아의 작곡가. 페터스부르그 출생. 광산기사이며 음악 애호가인 아버지(Dmitri Boleslawowitsch Schostakowitsch)와 페터스부르그 음악원 출신의 피아니스트인 어머니(Sofia Wassiljewna Kokoulin) 사이에서 태어났다. 9세때부터 어머니에게 피아노를 배우고, 11세에 글랴세르 (Glyaser) 음악학교에서 작곡공부를 시작하였다. 1919년 레닌그라드 (구 페터스부르그) 음악원에 입학하여 니콜라이에프(Leonid Nikolayev)에게 피아노를, 슈타인베르그(Maximilian Steinberg)에게 작곡을 배우고 1925년 졸업하였다. 졸업작품으로 쓰여진 <교향곡 제1op.10> (1924-25)의 성공을 계기로 하여, 소련 국내에서 뿐만이 아니라 세계적으로 그의 이름이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이 곡은 전통적인 교향곡의 어법으로 쓰여졌으나, 젊은 작곡가가 서구의 새로운 경향에 눈을 떠, 전통으로부터 벗어나려는 의지를 보여주고 있다. 당시 레닌그라드 음악계에는 유럽의 현대음악, 즉 스트라빈스키(Igor Strawinsky)의 원시주의와 베르크(Alban Berg)의 표현주의 음악등이 성행하여 그도 그 영향을 강하게 받았다. 이 시기의 작품으로 <교향곡 제2op.14>(1927), <교향곡 제3op.20>(1929), 고골(Nikolai Gogol)에 의한 오페라 <op.15>(1930), 발레 <황금시대 op.22>(1930)등이 있다. 그러나 1934년에 발표한 오페라 <므첸스크의 맥베드 부인 op.29>이 당시 소련체제의 예술계에서 전개되고 있던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예술 운동에 역행한다는 이유로 공산당 기관지 "프라우다"로부터 "서구적인 퇴폐성을 띤 형식주의자의 불협화음"이라는 맹렬한 비판을 받아, 그는 큰 정신적인 위협을 받게되었다. 당시 소비에트 당국이 작곡가들에게 요구한 사회주의 리얼리즘에 부합되는 음악이란 "인민 대중에 의해 지지되고 그들을 위해 존재하는 음악", "간결해야 할 것, 명확하고 진실해야 할 것, 형식적으로 민족적이어야 할 것, 그리고 내용적으로 사회주의적이어야 할 것"이라는 것이다. 소수의 청중만을 위한 난해한 음악은 사회주의의 이념에 위배되는 "형식적인 음악"으로 낙인찍히곤 했다. 이러한 창작에 대한 소비에트 당국의 정치적 간섭에 대항하여 스트라빈스키, 프로코피에프 등 다른 작곡가들이 서방으로 망명한 것에 반하여, 쇼스타코비치는 자신의 작풍을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창작법으로 전환하여 1937<교향곡 제5op.47>을 발표하였다. 그는 이 곡의 초연 시에 "당국의 비판에 대한 소비에트 예술가의 답변"이라 언급하였는데, 초연은 대단한 성공을 거두어 소비에트 당국의 절대적인 호평을 받았으며, 쇼스타코비치는 다시 국가적인 영웅으로서 그의 명예를 회복하고, 1941년에는 <피아노 5중주곡 op.57>로 제1회 스탈린 상을 수상하였다. 2차 세계대전 때에는 레닌그라드에서 방공감시원으로 종군하였고, 1942<교향곡 제7op.60 "레닌그라드">로 다시 스탈린 상을 수상하였다. 그러나 종전 후 신고전주의적인 성격을 띤 <교향곡 제9op.70>(1945)1948년 공산당 중앙위원회가 소집한 소련 음악가 회의에서 "타락한 부르조아의 형식주의에의 추종"이라는, 이른바 "지다노프 비판"의 대상이 되었는데, 쇼스타코비치는 스탈린 정책을 찬양하는 오라토리오 <숲의 노래 op.81>을 발표하여 이를 무마하고 1950년 다시 스탈린 상을 수상하였다. 1953년 스탈린이 사망한 뒤에는 12음 기법, 비극적인 테마, 신고전주의적인 형식 등을 도입하기도 하는 등 이전과는 다른 새로운 작풍을 보여주었다. 이 시기의 작품으로 <교향곡 제10op.93>(1953)을 들 수 있는데, 보수적인 기법으로 쓰여진 이 곡은 고뇌에 찬 작곡가의 내면세계를 그리면서도 서구의 아방가르드와도 상통하는 면을 보여주고 있다. 그 뒤에 발표된 <교향곡 제11op.103 "1905">(1956-57)<교향곡 제12op.112 "1917">(1960-61)은 다시 표제 음악적으로 쓰여졌으나, <현악 4중주곡 제8op.110>(1960)<교향곡 제10>과 유사한 경향을 보여주고 있다.     

 

뛰어난 피아니스트이기도 한 그는 1927년 바르샤바의 쇼팽 콩쿠르에서 2위를 차지하였고, 1937-41년에는 레닌그라드 음악원에서, 1943-48년에는 모스크바 음악원에서 작곡 교수를 역임하였다. 또한 소련 평화위원회의 멤버로 활약, 1954년에는 세계 평화협의회에서 국제 평화상을 받았다

 

그가 남긴 작품으로는 15곡의 교향곡 외에 15곡의 현악 4중주곡을 비롯하여, 기악곡, 협주곡, 오페라, 오라토리오, 칸타타, 발레음악, 영화음악, 대중가요까지 각종 장르를 망라하고 있는데, 작풍 또한 각양각색이어서, 장르에 따라, 또는 당국의 의향에 따라 자유자재로 바꾸어 나간 것으로 여겨진다. 이러한 경향은 일종의 "기회주의"라기보다는, 구 소련의 사회주의 체제하에서 공식적으로 소련 제일의 작곡가로서의 위치를 지키려는 작곡가의 필사적인 노력과 투쟁이라고 보여진다. 따라서 쇼스타코비치의 예술행로는 혁명후의 국가 조직에서 제2차 세계대전, 그리고 전후의 부흥에서 스탈린의 개인숭배시대를 거쳐 해빙으로 전환되기까지의 소련의 현실이 반영된 것이며, "사회주의 리얼리즘""형식주의", "쉬운" 음악과 "어려운" 음악, "다수의 대중을 위한" 음악과 "소수의 전문가를 위한" 음악, 예술가의 "사회적 과제와 책임""자유로운 실험정신", "정치성""순수성" 등의 모순된 명제의 대립과 갈등 속에서 점철된 것이라 해석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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