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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만,빅토르 [Ullmann, Vikt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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빅토르 울만 (Viktor Ullmann 1898년 체코의 테션에서 출생-1944년 아우슈비츠에서 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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빅토르 울만은 1898년 1월1일 당시 오스트리아령 슈레지언 지방의 테션에서 독일계 유태인이며 군인이 직업이었던 아버지 막시밀리안 울만 (Maximilian Ullmann)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가 어린시절 어떤 음악 환경에서 성장했는 지, 언제부터 음악 교육을 받았는 지에 관해 지금까지 밝혀지지 않고 있다. 11세에 부모들의 고향인 비엔나로 이사를 간 후 한스 아이슬러(Hanns Eisler)와 요셉 트라우넥(Josef Trauneck)과 같은 학교에 다니면서 이들과의 교우관계 속에서 음악에 대한 관심을 키워나갔을 가능성이 크다하겠다. 

그러나 16세에 쇤베르크의 제자 요셉 폴나우어 (Josef Polnauer)에게서 음악공부를 하게 된 것이 장차 울만의 음악적 발전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으로 보인다. 제 1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1918년부터 쇤베르크의 작곡쎄미나에 참여하여 1919년 5월까지 제 이의 비엔나 악파의 일원으로 "사적음악연주회"에서도 활약을 하였다. 1920년 울만이 프라하 신독일극장의 합창지휘자로 프라하에서 일할 때에도 쇤베르크 주위의 음악가들과의 교분은 계속되었다. 1924년 울만의 작품 "소프라노와 실내오케스트라를 위한 7곡의 노래(7 Lieder fuer Sopran und Kammerorchester)"이 국제 신음악연주회(IGNM)에서 연주되는 등 작곡가로서 인정을 받았지만 자신의 작품을 출판할 출판사를 찾는데 어려움을 겪게 되고 울만의 작곡가로서의  회의는 짙어졌다.  

그러던 중 1931년 울만은 작곡 및 모든 음악적 활동을 포기하고 루돌프 슈타이너(Rudolf Steiner)의 인지학에 몰두 하게된다. 생활방편으로 서점을 열기 위해 1932년 독일 슈트트가르트의 한 서점을 인수했으나 1933년 히틀러가 정권을 잡자 유대인 상점에 대한 독일인의 핍박이 심해져 유대인이었던 울만은 다시 프라하로 돌아갈 수 밖에 없었다. 1935년 프라하에서 작곡가 알로이스 하바(Alois Haba)와 만남으로 그 동안의 휴지기간을 청산하고 다시 창작을 시작하는데 그 첫 작품이 오페라 "반그리스도의 몰락(Der Sturz des Antichrist)"이다. 하바의 서술에 따르면 이 작품에 울만이 존경했던 알반 베르크의 오페라 "보첵(Wozzek)"의 영향이 나타난다. 내용적으로는 다가올 전체주의적 정부와의 정신적 결투를 다루는데, 악의 대표격인 독재자가 모든 사회적 정신적 권력을 장악하였지만 유독 선의 상징으로 등장하는 예술가는 굴복시키지 못한다. 그러나 민중 앞에 "반그리스도"로 정체가 밝혀지는 이 예술가는 결국 자신의 오만에 스스로 멸망하게 된다. 1936년 비엔나 유니버살 출판사의 헤르쯔카 (Hertzka) 상을 받게 되는 이 작품부터 울만은 왕성한 작곡활동을 하게 되는데 "오케스트라와 섹스폰을 위한 슬라브 랩소디", "피아노협주곡", 2곡의 "피아노 소나타", 소 오페라 "깨어진 항아리(Der zerbrochene Krug)", "바이올린과 피아노를 위한 소나타" 그리고 다수의 연가곡 등이 있다. 

이러한 창작욕은 유대인을 수용하기 위해 설치한 게토 테레지엔시(Theresienstadt)에 수감되고 (1942년 9월) 나서도 변하지 않았다. 프라하에서 북서쪽에 위치하는 이 게토는 나찌들이 그들의 정치적 선전의 목적으로 유대인의 문화적 활동을 게토 내에서 허락하며 보조하였으므로 1944년 10월 울만이 아우슈비츠의 가스실로 운송되어 죽기까지 많은 작품을 쓰게 된다. 그 중 오페라 "대서양의 황제 혹은 죽음의 거부(Der Kaiser von Atlantis oder Die Todverweigerung)"는 저항의 음악으로서 뿐 만 아니라 울만의 대표작으로도 그 의미가 높이 평가된다. 전체가 4부분으로 나뉘어진 이 오페라의 주인공은 죽음 자체이며 히틀러와 전쟁에 대한 암시가 분명해 나찌들은 무대 연습 도중에 곡을 금지시키게 된다. 그래서 이 작품의 초연은 1976년으로 미루어지고 만다. 게토에서 작곡한 다른 작품들도 ("현악 4중주 3번"과 3곡의 피아노 소나타 그리고 릴케, 횔더린, 마이어등의 시에 부친 연가곡과 합창곡 및 히브리어 노래등) 90년대에 들어서서야 차츰 빛을 보게 된다. 

나찌수용소의 고난과 핍박을 표현하는 것은 "대서양 자체를 한 방울도 남기지 않고 마시는 것과 지구를 포옹하는 것"처럼 표현의 영역을 넘어선다는 수용인의 기록이 있지만 울만은  게토에서 언제 죽게 될 지 모르는 불안과 고통을 예술의 힘으로 이겨 나가려 했음을 알 수 있다.    
[이경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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