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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허 [Silcher, Philipp Friedric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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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허(Philipp Friedrich Silcher, 1789-18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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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허는 한국에서 교과서에 나오는 독일 노래 <로렐라이> 작곡가로 널리 알려져 있는 사람이다. 하지만 그는 민요 작곡가로서 뿐만 아니라 음악교사 또는 합창지도자로서도 많은 일을 했다. 그는 농부(포도원) 가문의 음악교사 아들로 태어났다. 학생시절에는 교사 지망생으로서의 공부 외에 음악실기의 연마와, 수학, 음악학 등에 폭넓은 지식을 쌓았다. 이때 접한 페스탈로찌의 교육사상은 뒤에 그를 민중을 상대로 한 보통교육으로서의 음악교육에 헌신하게 만들었다(페스탈로찌 사상을 음악교육에 최초로 수용한 H.G. 네겔리와 같이 활동). 그는 20세의 나이로 초등학교(여학교) 교사로 부임하여 일하였다. 그는 교사로 일하면서 페스탈로찌의 사상을 음악교육에 실현하려는 사람들과 함께 활동할 기회를 가졌다. 그러면서 보통교육으로서의 민중 음악교육(musikalische Volkserziehung)에 다시 한번 확신을 갖게 되었다. 또 이때 베버(C.M. von Weber)를 만나면서 음악과 그림 사이에서의 방황을 끝내고 음악 쪽으로 활동 방향을 정했다. 1815년 교직을 그만두고 특별한 직업이 없이 음악 개인교습을 하면서 피아노와 작곡을 크로이쳐(K. Kreutzer)와 훔멜(J.N. Hummel)에게서 배웠다. 그 후 28세(1817년)에 튜빙겐 대학교의 음악감독(일종의 강사 겸 동아리 지도자)과 튜빙겐 신학교의 음악교사로 일하게 되면서 아마츄어를 위한 합창 활동에 각별한 관심을 보였다. 1829년 "대학 노래단"(Akademische Liedertafel)이라는 남성합창단을 만들었으며, 1839년에는 "오라토리오 동호인회"(Oratorienverrein)라는 혼성합창단을 창립했다. 이후에도 합창지도자 양성과 합창단 건설에 혼신의 힘을 다했다. 또한 그는 이러한 자신의 합창 활동을 위해 민요들을 편곡해 모아 출판했으며, 그 노래들은 오늘날도 독일어권에서 자주 레퍼토리에 오른다. 튜빙겐 대학교는 1852년 그에게 명예박사 학위를 수여했으며, 병으로 은퇴 할 때는 "음악분야에서의 민중(국민)교육에 기여한 공로"로 그에게 기사 훈장이 수여되었다.

질허의 음악교육 활동은 18세기 말 헤르더(J.G. Herder)를 비롯한 학자 및 예술가들이 주창한 "민요"(Volkslied) 운동과 이후 페스탈로찌(Heinrich Pestalozzi)를 비롯한 교육가들이 제창한 민중(국민)교육 운동과 맥을 같이한다. 18세기 이후 유럽의 지식인들은 사회 기저층의 노래로서의 민요(민중의 노래, 전래노래의 뜻은 아님)가 갖는 중요성을 인식하고, 이것을 예술로 끌어 들였다. 그래서 민요는 한편으로 수집되고 또 예술가들에 의해 창작되었다. 따라서 민요는 해당 노래 또는 시(詩)가 갖는 민중적 보편성이라는 특징에 기인한 말이지 토속 또는 민속인들에 의해 전해내려온 것에 한정되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이러한 민요운동은 질허에게서 보듯이 곧 음악적(예술적) 민중교육의 차원에서 이루어졌다. 보통교육의 가치와 그 필요성은 음악을 통해서도 추구되어야 했고, 질허는 그 구체적 방안에 대해 많은 생각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전문가들의을 위한 것이 아니라 사회의 보편적 인간을 대상으로 한 음악교육을 위해서 민요는 매우 중요한 교육내용이 될 수 있었다. 하지만 -어쩌면 당연하게도- 대부분의 민요들은 그 원천이 오랜 세월을 통해 형성된 전설처럼 민중적 냄새를 가지고 있을지라도 민중에게서 직접적으로 탄생되지 않았고 오히려 전문가 집단(예술가)에 의해 그 모습을 드러내게 되었다. 질허 역시 민중의 한 사람으로서가 아니라 음악가 그리고 교육자로서 민요의 생산 내지 가공에 노력을 기울였던 것이며, 특히 일반인의 합창교육을 통해 민요의 교육적 가치를 실현하려고 했다. 

로렐라이((Loreley 또는 Lorelei)는 라인강 가에 있는 132m 높이의 절벽 이름이다. 폭이 좁고 휘었을 뿐만 아니라 물결이 거칠어 옛부터 이곳을 지나는 뱃사람들에게 매우 위험한 곳으로 알려졌다. 그래서 19세기에는 수상교통을 원활히 하는 차원에서 이곳을 자주 고쳤으며, 1970년대에도 큰 배들이 다닐 수 있도록 수로 공사를 했다. 뱃사람들을 파멸로 이끄는 아리따운 물의 처녀 로렐라이에 관한 전설은 19세기 문학가들에 의해 만들어진 가공의 이야기라고 알려져 있다. 19세기 초 브렌타노(Clemens von Brentano)는 라인강을 여행하면서 절벽과 관련된 예쁜 처녀 이야기를 떠올렸고, 이것을 -비극적 전설을 다루는- 발라드 <로레 라이>(Die Lore Lay, 1801)로 만들었다(줄거리는 노래의 것과 다르다). 그 이후 독일의 이름있는 문학가들이 시나 이야기의 형태로 이 내용을 다루었으며(J. von Eichendorf, 1815; O.H. von Loeben, 1821), 특히 하이네(H. Heine, 1824)의 시에 질허가 곡을 붙임으로써 더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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