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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사
만하임 악파 [Mannheimer Schule, Mannheim schoo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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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하임 악파(도. Mannheimer Schule, 영. Mannheim School)

<간단한 설명>
팔츠지방의 선제후 칼 테오도르(Karl Theodor, 1742-1799)의  만하임 궁정악단에서 활동한 작곡가들은 독자적인 전고전주의의 기악양식을 발전시켰다. 만하임은 나폴리, 비엔나, 빠리, 런던과 함께 당시에 오케스라 음악을 크게 발전시킨 도시 중 하나였다. 이들 도시 중 만하임 궁정은 당시에 전 유럽적으로 가장 유명한 오케스트라를 갖고 있었다. 음악사적으로는 비엔나 고전주의 음악이 꽃피울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한 악파로 평가받는다.

만하임악파는 오케스트라의 표현효과를 확대시켰다. 4개악장의 소나타 편성, 관악기 그룹의 독립적 편성, 보다 화성적인 악곡, 대비적인 테마 구성, 관용어법적인 멜로디의 사용이 그것이다 . 특히  크레셴도와 데크레셴도의 사용은 만하임 악파의 두드러진 특징으로 간주되었다. 이러한 특징들은 감정을 격앙시키기에 알맞다. 관용화된 선율들은 하이든, 모차르트, 베토벤 등에게서도 자주 볼 수 있는 것들이다.
A. 로케트 음형
B. 탄식음형
C. 회전 음형
D. 미끌어지는 앞꾸밈음(Schleifer)
E, 번개 음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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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하임 악파 음악의 음형들


만하임 악파에 속한 작곡가들은 다음과 같다. 
홀츠바우어(Ignaz Holzbauer), 
쇼베르트(Johann Schobert), 
리히터(Franz Xaver Richter), 
토에스키(Carlo Giusppe Toëschi), 
칸나비히(Johann Christian Cannabich), 
포글러(Georg Joseph Vogler), 
요한 슈타미츠(Johann Stamitz)
칼 슈타미츠(Karl Stamitz)


<자세한 설명>

만하임 악파의 일반적 개념
     
     음악사에 나타난 만하임 악파는 무엇보다도 18세기 유럽 최고의 오케스트라로서 그 명성은 수많은 음악가들과 음악학자들의 기록을 통해 오늘날까지 전해 왔다. 하지만 만하임 악파의 명성은 18세기 후반을 전후로 하여 급속하게 퇴색하였고, 요한 슈타미츠를 제외하고는 수많은 음악가들이 음악사의 뒤안길로 잊혀지게 되었다. 이러한 망각의 시기를 지나 19세기 말과 20세기 초반 발터(Friedrich Walter), 리만(Hugo Riemann) 그리고 아들러(Guido Adler)등의 역사학자와 음악학자들의 연구에 힘입어 만하임 악파가 재조명 되었다. 만하임 악파와 관련된 명확한 시기구분과 음악사적 의미, 그리고 음악적 특징들에 대한 논의가 오늘날까지 진행되고 있다.
      일반적으로 음악사에 서술된 ‘만하임 악파'의 개념은 칼 테오도르(Karl Theodor) 선제후가 독일 남부 라인강 유역에 위치한  만하임(Mannheim) 도시를 통치하였던 1742/43년부터 뮌헨으로 이주한 1777/78년까지 만하임 오케스트라와 궁정악단(Hofkapelle)에서 활동하였던 음악가들을 의미한다. 대표적인 음악가로는 만하임 악파의 창시자이자 정신적 지주로 불리는 요한 슈타미츠(Johann Stamitz)와 프란츠 자버 리히터(Franz Xaver Richter), 이그나츠 홀츠바우어(Ignaz Holzbauer), 그리고 요한 슈타미츠의 제자들인 크리스티안 카나비히(Christian Cannabich), 칼 요셉 토에스키(Karl Joseph Toeschi), 이그나츠 프랜츨(Ignaz Fraenzl) 그리고 안톤 필츠(Anton Filz) 등이 있다. 
만하임악파 개념의 역사적 변화를  단순하게 정리하면 오케스트라와 바이올린 기법에 대한 기록이 18세기의 만하임 악파의 중심 개념이었으며, 19세기에 들어 슈바르트(Christian  Friedrich Daniel Schubart)에 의해 만하임 악파에 대한 개념이 1)만하임 오케스트라-바이올린 악파(학교), 2) 작곡악파, 3) 성악학교로 분리되어 정의되었다. 뿐만 아니라 이때에서야 시기적, 장소적 구분으로 만하임 활동시기(만하임 악파)와 뮌헨 활동시기(팔츠-바이에른 악파)로 구분되었다. 이러한 접근법을 토대로 20세기에는 다시 만하임의 작곡기법과 음악장르에 대한 다양한 논의를 통해 만하임 악파에 대한 보다 체계적이고 구체적인 연구와 개념 정의가 시도 되었다. 

18세기의 만하임 악파의 개념

     ‘만하임 악파(학교)’라는 개념은 1771년 요한 크리스토프 슈톡하우젠(Johann Christoph Stockhausen)에 의해 처음으로 사용되었다. 그에게 있어서 보헤미아 출신 음악가 요한 슈타미츠는 '만하임 악파에서 가장 뛰어난 음악가‘ 였다. 뿐만 아니라 슈타미츠는 만하임 악파의 설립자이자 정신적 지주였다. 슈톡하우젠에게 있어 '악파(학교)'의 개념은 '바이올린 악파'를 의미했다. 즉 만하임 악파라는 개념은 18세기 중반까지 작곡가 중심의 악파가 아니라 바이올린 학교 또는 오케스트라 연주자 중심의 악파에 관한 개념이었다.
     18세기 중반에 만하임을 방문한 수많은 사람들은 당시 만하임 오케스트라의 연주기법, 편성규모, 연주의 완벽성, 연주규율, 다이나믹 효과 그리고 오케스트라 단원들의 개개인의 비르투오조에 대해 경탄해 마지않고 있었다. 1794년 베를린의 음악비평가인 슈파치어(Johann Gottlieb Karl Spazier)는 만하임의 오케스트라는 유럽에서 최고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는 만하임 오케스트라를 설명하면서 요한 슈타미츠를 통해 바이올린을 사사받은 다수의 제자들이 전통을 계승하고 있다고 적고 있다. 그 중에는 요한 슈타미츠의 두 아들인 칼 슈타미츠(Karl Stamitz)와 안톤 슈타미츠(Anton Stamitz)와  만하임의 수석연주자인 프랜츨 그리고 뮌헨의 음악감독 카나비히와 토에스키 형제들을 언급하고 있다.
1767년 에 힐러(Johann Adam Hiller)가 쓴 기록에 의하면 요한 슈타미츠가 바이올린뿐만 아니라 작곡까지 그 제자들을 가르쳤다고 언급하면서 대표적으로 카나비히와 토에스키가 바이올린연주자 및 작곡가로 활동하고 있다고 소개하고 있다. 

19세기의 만하임 악파의 개념

     19세기 초반에 들어서 만하임 악파에 대한 개념이 오케스트라와 바이올린 기법 중심의 시각에서 벗어나 보다 넓고 광범위한 접근이 시도되었다. 슈바르트는 1806년 자신의 책에서 만하임 악파를 '팔츠-바이에른 악파‘와 '만하임 악파’로 분리하여 설명하고 있다. 그는 첫 번째 근거로 정치적 문화적 상황, 즉 만하임의 칼 테오도르 선제후의 만하임 통치기간과 바이에른 통치 시기가 문화적 정치적으로 다르다는 점을 제시하였다. 두 번째로 지정학적인 측면과 역사적인 관점을 제시하고 있다. 슈바르트는 만하임을 교육현장이자 동시에 활동공간으로 이해했으며, 기악음악 연주자들과 작곡가 그리고 성악가들이 만하임에서 교육을 받고 유럽 최고의 음악악단을 구성한 것으로 접근하였다. 슈바르트는 당시대인으로는 드물게 오케스트라(바이올린) 학교와 작곡학교에 이어 성악분야를 세 번째 범위로 언급하였다. 슈바르트에 의하면 만하임 악파의 성악예술도 뛰어났으며, 독일 출신과 다른 지역 출신 성악가들이 만하임 악파를 성립하게 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한편 리포브스키(Lipowsky)는 오케스트라 학교와 작곡학교가 긴밀하게 상호 작용하여 영향을 주었다고 인식하였다. 1811년 리포브스키는 '바이에른 음악사전‘의 <만하임 궁정악단> 항목에서 오케스트라 기법은 작곡과 긴밀한 연관을 가지고 있으며 오케스트라의 다양한 표현법은 빠른 움직임, 유연성, 강렬함 등으로 작곡기법에 직접 영향을 주었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처럼 19세기에 접어들어 만하임 악파는 오케스트라 학교와 작곡학교로 그 의미가 확대된다. 하지만 그 두 분야에서도 항상 요한 슈타미츠가 중심인물로 평가되었다.
     19세기 말 만하임에서는 만하임 도시의 역사를 재조명하는 다각적인 움직임이 나타났다. 그 중에서 프리드리히 발터는 시의회의 위탁을 받아 방대한 양의 문서를 연구하였다. 1898년 그는 '쿠어팔츠 궁정(만하임궁정)의 연극과 음악의 역사"(Geschichte des Theaters und der Musik am Kurpfaelzischen Hofe)를 출판하여 만하임 악파의 연구에 중요한 획을 긋게 되었다. 프리드리히 발터는 방대한 양의 자료를 통해 그 동안 잊혀졌던 만하임 궁정악단을 재조명 하였다. 그는 실내음악과 교향곡을 중심으로 홀츠바우어, 크리스티안 카나비히, 요한 슈타미츠 그리고 토에스키 등을 기악음악에서 하이든이나 모차르트보다 앞선 음악가로 소개하였다. 그는 만하임의 작곡가들이 하이든 이전의 교향곡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는 가정을 주장하였다. 이러한 가정은 다시 4년 후 리만에 의해 다시 재창되었다.

20세기의 만하임 악파의 개념과 연구 경향
     19세기 말 프리드리히 발터의 연구는 20세기 만하임 연구의 중요한 학문적 기반을 조성하였다. 당시 라이프치히 대학의 음악교수로 재직하고 있었던 독일의 저명한 음악학자 리만은 만하임 악파의 재조명을 통해 서양음악사를 재편성하고자 하였다. 리만은1902-15년 사이에 '바이에른의 기념비적인 음악가들'(DTB, Denkmäler der Tonkuenstler im Bayern) 시리즈에 만하임 악파의 교향곡과 실내음악을 수집 정리하여 출판하고 주제별 카탈로그를 정리하였다. 그는 자신의 광범위한 연구를 통해 만하임 악파의 음악 유형이 비엔나 악파에 앞서 기초를 만들었다고 주장하였다. 요한 세바스찬 바하의 사망연도인 1750년을 전후로 나타난 '갑작스러운 음악취향의 변화'에 대한 해답을 리만은 만하임 악파를 통해 얻고자 하였다. 즉 바흐의 음악에 나타난 대위법과 엄격한 작곡기법이 상대적으로 단순하고  화성적인 비엔나 고전시대로의 변화하는 과정에서 중간 발전 단계가 없이 도약되었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갑작스러운 음악의 도약사이에 '만하임 악파‘는 바로 그 중간 단계로서 비엔나 악파의 생성에 영향을 주었다고 주장하였다. 의도하였건 의도하지 않았든지 간에 리만의 '만하임 악파의 음악이 비엔나 고전으로 발전 하는 전 단계’라는 가설은 오스트리아(비엔나) 중심의 음악사를 독일(만하임) 중심으로 새롭게 해석 하려고 한 것이었다. 리만에 의하면 요셉 하이든의 음악적 선배는 요한 슈타미츠이며 만하임 악파가 비엔나 악파보다 우선한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주장은 결국 비엔나의 음악학자 아들러와의 논쟁을 불러왔으며 이를 통해 18세기 음악에 대한 연구가 활성화되는 계기가 되었다. 리만의 만하임 악파의 대표적인 연구를 간략하게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1902년 '바이에른의 기념비적인 음악가들‘(DTB, Denkmäler der Tonkünstler im Bayern) 작품집 제 3-1권: '팔츠 바이에른의 교향곡 - 만하임의 교향곡 작곡가들’(Sinfonien der pfalzbayerischen Schule - Mannheimer Symphoniker)
리만은 이 작품집에서 요한 슈타미츠(1717-1757), 프란츠 자버 리히터(1709-1789), 안톤 필츠(1725년경-1760)의 교향곡을 소개하고 서문에 만하임 악파에 대해 서술하였다. 리만은 이 서문에서 '의심의 여지없이 요한 슈타미츠가 바로 우리가 긴 시간 동안 찾았던 하이든의 선배이다"라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주장은 다시 비엔나 지역의 음악학자인 아들러의 반론의 대상이 되었다.

(2) 1907년 DTB 제 7-2권에서 리만은 요한 슈타미츠, 프란츠 자버 리히터, 안톤 필츠, 이그나츠 홀츠바우어(1711-1783) 그리고 쥬세페 토에스키(1724-1788)의 교향곡을 소개하였다. 리만은 이 작품집의 서문을 통해 '만하임의 스타일과 기법‘(Der Stil und die Manieren der Mannheimer)을 발표하고 소위 '만하임 기법’을 정리 소개하였다. 뿐만 아니라 만하임 작곡가들의 교향곡의 주제들을 체계적으로 정리하였다.

(3) 1908년 DTB 제 8-2권에서 다시 크리스티안 카나비히(1731-1798), 칼 슈타미츠(1746-1801), 프란츠 벡(Franz Beck, 1730-1809) 그리고 에른스트 아이흐너(Ernst Eichner, 1740-1777)의 교향곡을 소개하고 음악적 특징을 서문에 발표하였다. 리만은 이 서문에서 아들러의 주장을 반박하였다.

(4) 1914년에 리만은 다시 DTB 제 15권에 '18세기 만하임의 실내음악 제 1부: 사중주와 오중주(피아노 제외)' (Mannheimer Kammermusik des 18. Jahrhunderts, I.Teil: Quartette und Quintette -ohne Klavier)를 출판하였다. 그는 이 작품집에 프란츠 자버 리히터, 이그나츠 홀츠 바우어, 요한 밥티스트 벤들링(Johann Baptist Wendling, 1720-1797), 요셉 토에스키(1724-1788), 크리스티안 카나비히(1731-1798), 에른스트 아이흐너, 칼 슈타미츠(1746-1801), 아베 게오르그 요셉 포글러(Abt. Georg Joseph Vogler, 1749-1814), 안톤 슈타미츠(Anton Stamitz, 1754-1820) 그리고 프란츠 단치(Franz Danzi, 1763-1826)의 사중주와 오중주를 소개하였다. 

(5) 1915년 DTB 제 16권에 실내음악 제2부 '삼중주와 이중주- 피아노 편성 제외‘ : (Trios und Duos - ohne Klavier und mit obligatem Klavier-)을 출판하여 프란츠 자버 리히터, 요한 슈타미츠, 빌헬름 크람머(Wilhelm Cramer, 1745-1799), 요셉 토에스키(1724-1788), 칼 슈타미츠, 안톤 필츠(1730-1760), 요한 프리드리히 에델만(Johann Friedrich Edelmann, 1749-1794), 에른스트 아이흐너, 프란츠 자버 슈테르켈(Franz Xaver Sterkel, 1750-1817) 그리고 안톤 슈타미츠의 삼중주와 이중주를 소개하였다. 그는 이 작품집에 방대한 양의 만하임 실내음악을 주제별 카탈로그로 정리하였다.

     이처럼 리만은1902년 이후 5권에 걸쳐 만하임의 교향곡과 실내음악을 DTB 시리즈에 출판 소개하여 만하임 악파의 재발견자로서 음악사에 이름을 기록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로 인해 20세게 초반에 약간은 민족감정과 국가주의에 기반을 두고 독일과 오스트리아 음악학자들 사이에 논쟁이 발생하였다. 서로 대립되는 가장 중요한 논점은 ‘만하임 악파의 작곡기법 또는 작품의 의미와 위상을 어떻게 정립하는가‘ 였다. 리만에 의하면 요한 슈타미츠를 중심으로 만하임 악파는 오케스트라를 중심으로 하는 연주 악파를 넘어 '작곡학교(악파)"의 개념으로 그 위상이 정립된다. 리만은 리히터, 필츠, 홀츠바우어, 토에스키 그리고 카나비히 등이 만하임 악파의 발전에 크게 기여했음에도 불구하고 요한 슈타미츠를 새로운 기악음악의 창조자로 그 의미를 강조하였다. 나아가 만하임 악파가 비엔나 고전주의를 예시하는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다고 주장하였다. 즉 비엔나 고전주의를 여는 선구자적인 역할을 담당하게 된 만하임 악파는 소위 '만하임 기법"과 교향곡 3악장에 메뉴에트를 사용하여 요셉 하이든의 비엔나 고전주의를 예시했다는 것이다. 
     한편 아들러는 1908년 '오스트리아의 기념비적인 음악가들‘(Denkmäler der Tonkünst in Österreich)의 제31권의 서문에 '1750년대 전후의 비엔나 기악음악. 비엔나 고전주의의 선구자들’이라는 글을 발표하면서  리만의 주장을 정면으로 비판하였다. 아들러는 1750년경의 음악취향의 갑작스러운 변화는 한 개인 예술가에 의한 것이 아니라고 주장하였다.  아들러는 1750년대 전후의 비엔나 음악의 특징들을 제시하면서 만하임 악파의 영향이 아니라 비엔나의 자체적인 전통에 의해 하이든과 모차르트의 음악적 특징들이 나타났다고 주장하였다. 또한 아들러는 만하임 악파의 설립자들인 슈타미츠, 리히터의 고향이 보헤미아지방이며 홀츠바우어의 고향이 오스트리아 출신임을 지적하며 만하임 악파는 비엔나 악파의 지부 정도로 해석된다고 주장하였다. 아들러는 무엇보다도 리만식의 접근법, 즉 요한 슈타미츠 한 개인을 중심으로 하는 연구의 위험성을 지적하였다.
     이후 수많은 음악학자들은 만하임 악파와 비엔나 악파의 음악적 특징과 음악사적 우선권을 해명하고자 다양한 관점에서 연구를 하였다. 그 중에서 카미스키(L. Kamieski)는 1908/09년에 '만하임과 이탈리아‘라는 글에서 소위 '만하임의 기법’을 조사한 결과 리만이 설명한 만하임의 특징들은 이탈리아 기악음악에 나타나고 있다고 주장하였다. 이를 통해 리만이 주장하였던 '만하임의 기법‘이 만하임에서 슈타미츠에 의해 창조된 것이 아니고 이미 이탈리아 기악음악에 사용된 사실이 밝혀졌다. 결국 리만의 가설은 다양한 연구를 통해 그 오류가 드러나게 되었다. 하지만 리만을 추종하는 수많은 음악학자들은 계속해서 만하임의 음악적 특징들을 지속적으로 연구하였다.  
     한편 이탈리아의 음악학자 토레프란카(Torrefranca)는 1930년 비엔나 악파와 만하임 악파의 음악 모두가 이탈리아의 영향을 받았음을 다시 한번 더 주장하였다. 이를 통해 더 이상 만하임 기법에 대한 개별 연구는 많이 퇴조하였고, 만하임 악파의 개념에 대한 연구만이 남게 되었다.
      20세기 중반에 들어서는 만하임 악파 중에서 특정한 분야, 즉 악기의 사용이나 음악장르, 또는 잊혀진 음악가들에 대한 재조명이 활발하였다. 뵈세(H. Boese)는 1940년 '만하임 악파의 음악에 나타난 독주악기로서의 클라리넷‘(Die Klarinette als Soloinstrument in der Musik der Mannheimer Schule)이라는 박사학위논문에서 만하임 악파의 젊은 음악가들의 세대구분에 대한 문제점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다. 뵈세에 의하면 만하임 악파의 젊은 세대들은 만하임이나 그 근처에서 출생하여 그 지역에서 음악을 배우고 만하임에서 오랜 시간 활동하였으며 그 중 일부는 다시 뮌헨으로 이주하여 활동하였다. 이로 인한 만하임 악파의 각 세대간 구별의 어려움을 언급하였다. 뵈세는 만하임 악파의 후기세대는 고전시대와 낭만시대를 잇는 교량 역활을 하며, 만하임 음악가들은 근대적 개념의 기악음악을 만듦으로써 음악사적 의미가 크다고 평가하였다. 
     로베르트 뮌스터(R. Muenster)는 1956년 박사학위논문 '토에스키의 교향곡"(Die Sinfonien Toeschis)에서 요한 슈타미츠나 몇몇 작곡가 위주의 일방적인 음악사 서술을 비판하면서 슈타미츠에 비해 다른 음악가들의 의미가 매우 축소되었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토에스키의 생몰연대에 대한 명확한 접근을 위해 여러 기록들의 오류를 지적하였고, 토에스키와 그의 교향곡을 연구하였다. 에드워드 슈미트(E. Schmitt)는 1958년 박사학위 논문 '18세기 쿠어펠츠(만하임 궁정)의 교회음악"(Die Kurpfaelzische Kirchenmusik im 18. Jahrhundert)을 발표하였다. 
     프리드리히 칼 카이저(Friedrich Carl Kaiser)는 1962년 요한 슈타미츠의 아들인 칼 슈타미츠에 관한 박사학위논문 '칼 슈타미츠(1745-1801), 생애와 교향곡, 오케스트라 작품 카탈로그'(Carl Stamitz, Biographische Beitraege, Das symphonische Werk, Thematischer Katalog der Orchesterwerke)를 발표하였다. 카이저는 '만하임 악파" 개념의 보다 명확한 구분을 주장하였다. 그에 의하면 만하임의 '오케스트라 학교‘와 '작곡악파’는 구별되며, '오케스트라 학교‘는 좁은 의미이고 '작곡악파’는 넓은 의미의 개념이었다. 그에 의하면 엄격한 의미의 만하임 음악가는 이 '오케스트라 학교‘를 통해 배출된 음악가를 의미했다. 여기에서 음악가들의 출생지나 출신 국가들은 의미가 없었다. 카이저에 의하면 만하임의 작곡학교는 만하임 오케스트라에서 활동했거나 아니면 만하임의 대가(Meister)의 개인적인 학생들을 의미했다. 반면에 1778년 이후 만하임의 기술을 모방하거나 '만하임의 기법’을 사용했다고 하더라도 만하임의 작품으로 분류될 수  없다라고 주장하였다. 
     한편 라르센( Jens Peter Larsen)은 1962년 저명한 음악학자 펠러러(Karl Gustav Fellerer)의 60회 생일 기념논문집에 '만하임 악파의 의미에 관하여'(Zur Bedeutung der Mannheimer Schule)에서 리만의 학설인 만하임 악파와 비엔나 악파의 관련성을 다시 한번 연구하면서 만하임 악파와 비엔나 악파의 연관성이 없다고 강조하였다. 반면에 마센카일(G. Massenkeil)은 1965년 '만하임 악파의 당시대의 명성과 후대의 명성'(Ruhm und Nachruhm der Mannheimer Schule)을 통해 라르센과는 다른 결론을 도출하였다. 그에 의하면 만하임의 작곡기법들이 모차르트의 작품에 수용되어 고전주의 음악에 영향을 주었을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1990년 요하임 파이트(Joachim Veit)는 '젊은 칼 마리아 폰 베버. 프란츠 단치와 게오르그 요셉 포글러의 영향에 대한 연구'(Der junge Carl Maria von Weber. Untersuchungen zum Einfluss. Franz Danzis und Abbe Georg Joseph Voglers)에서 궁정신부였던 포글러와 만하임 악파의 마지막 세대인 프란츠 단치를 중심으로 독일 낭만주의를 대표하는 칼 마리아 폰 베버와의 연관성을 조명하였다. 이를 통해 만하임악파와 낭만주의의 관련성을 도출하였다. 
     1990년에는 독일 하이델베르크 대학에 '만하임 궁정음악 연구소‘가 설립되어 다양한 연구가 활성화되고 있다. 그 중에서 루드비히 핀셔 교수와 베르벨 펠커(Baerbel Pelker) 박사는 매우 활발한 연구를 하고 있다. 그들은 1992년에 '만하임의 궁정악단’(Die Mannheimer Hofkapelle)라는 책을 출간하였고, 펠커 박사는 독일의 음악사전(MGG 2)의 '만하임 악파‘(Mannheimer Schule)항목에 매우 자세한 내용을 서술하였다.
     이 외에도 만하임 악파와 관련된 수많은 박사학위 논문과 학술지 논문들이 있다. 그 중에는 요한 슈타미츠, 카나비히, 프랜츨, 홀츠바우어, 프란츠 자버 리히터 등의 음악가에 대한 다수의 논문이 있으며 이 연구는 독일 뿐 아니라 울프(Eugene K. Wolf)와 맥클라이몬스(Maria P. McClymonds)를 중심으로 미국 등지에서도 활발하다. 최근 본 필자는 만하임 궁정의 실내음악감독으로 활동하였던 칼 요셉 토에스키(1731-1788)의 실내음악에 관한 2004년도 박사학위논문을 통해 만하임 악파의 음악을 보다 더 자세하고 종합적으로  연구하기 위해서는 지금까지 교향곡 중심의 서술에서 벗어나 실내음악을 보다 더 통합적으로 연구할 필요성이 있음을 강조하였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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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mmering, Liselotte/ Hft, Brigitte: Art. "Mannheim", in: MGG2, Sachteil 5. Kassel [u.a.] 1996. Sp. 1635-1645.
Finscher, Ludwig: Mannheimer Orchester- und Kammermusik, in: Die Mannheimer Hofkapelle im Zeitalter Carl Theodor, hrsg. von Ludwig Finscher, Mannheim 1992.
Schubart, Christian  Friedrich Daniel: Ideen zu einer Ästhetik der Tonkunst der Tonkunst, hrsg. v. L. Schubart, Wien 1806, Repr. ed., Hildesheim 1969.
Pelker, Baerbel: Art. "Mannheimer Schuel", in: MGG2, Sachteil 5, Kassel [u.a.] 1996. Sp. 1645-1662.


등록일자: 2006-09-11
이성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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