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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음악
홍정수: 기독교와 한국전통음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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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와 한국전통음악

홍정수

이 글은 한글 옛 글이 본문과 많이 다르게 변환되었다.  또한 음표 그리는 것이 나오지 않아 정확하지 않은 말로 표현된 곳이 있다.


1.시작하면서

전통음악과 관련한 논의들은 한국 교회 내에서  꾸준히 있어 왔다. 그러함에도 이런 논의들이 서양적 교회음악이 주도하는 실제적 음악상황 하에서 자주 눈에 띄는 것은 아니었다. 또한 이러한 논의들은 많은 사람들이 그룹을 이루어 논의한 것이 아니라, 고립된 개인들의 목소리로 나타났다. 또한 그 논의들은 연속성을 가지고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래서 같은 생각을 가진 다음 세대의 사람들은 전에 그런 논의가 있었다는 사실을 잘 모르면서 마치 새롭게 하는 것처럼 전통음악적 교회음악을 주장했다. 논의들은 반대자들과의 갈등 관계를 형성하며 있어왔기에 전통음악적 교회음악을 반대자들의 비난도 간접적으로 나타난다. 반면에 서양적 교회음악 옹호자들에게서는 반대적 의견을 가진 자에 대해서 비판하는 것도 볼 수 있다. 이런 내용들에서 전통음악의 옹호 그룹과 반대 그룹의 갈등도 엿볼 수 있다.

이 글의 대부분은 <역사적 찬반의견>에 대해 다루었다. 그 첫머리에 소개되는 1899년에 쓴 복정채의 글에서는 한국 전통음악적 사고에 능숙한 사람이 서양식 교회음악을 처음 만나서 보여주는 생각이 엿보인다. 그는 어떤 음악이 더 교회에 맞다 또는 아니다의 입장을 보여주지 않고, 두 음악을 그냥 나란히 두고 그 두 가지 종류의 음악들이 서로 다름을 -서로 관련시키려는 생각이 없이- 확인하는 입장을 보여준다.

두 번째로 거론되는 길선주 목사는 한국 전통음악의 입장에서 교회음악을 생각했던 사람이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는 서양음악을 교회음악으로 채택하고 만다. 이는 당시에 한국음악을 교회에서 사용할 수 있는 상태로 만들어줄 수 없는 음악가들이 없었던 데에 그 큰 원인이 있었다.     

그 다음으로는 한국 전통음악에 대해 우호적인었던 선교사들에 관해 다루었다. 게일, 그로브, 밴 버스커크와 같은 사람들이 그들이었다. 이들은 나름대로 한국사람들이 노래하는 방식에 대해서 깊은 이해를 보였고, 그런 방향의 한국 교회음악을 추구했던 사람들로 보인다. 그러나 선교사의 대부분은 이런 그들의 견해로부터 거리를 지켰다기보다는 그런 문제에 관해 별다른 견해가 없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그렇다면 1910-20년대에 한국 전통음악적 성격을 가진 교회음악은 실제 어떤 모습은 있었을까? 있었다고 하면 어떤 모습을 하고 있었을까? 하는 의문이 제기될 것이다. 그러한 음악은 소수이지만 있었다. 대략 어떤 음악들이었는지를 소개하는 것이 필요하여 그런 것들을 살폈다. 이 음악들은 계승되지 않았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실패한 것이 되었다. 이 음악들은 번역된 서양식 찬송가와는 가사 내용과 음악이 매우 다른 모습이었으며, 교회적 관심을 모으지 못한 채로 소수의 문헌에 남아있다.    

그 다음에는 해방 이전의 전통음악 찬성자들과 반대자들이 나타난 시대순으로 소개된다.

△찬성자: 구왕삼(1931), 박경호(1941)

△반대자(또는 반대기록): 한국인 김씨(1917), 신정찬송가(1931), 채기은(1938)

위에 나타나는 사람들과 기록들은 모두 일제 시대의 것들이다. 그런데 이때 당시 -거의가 기독교인들이었던- 한국의 양악가들이 한국 전통음악에 대해 어떤 태도를 취하고 있었는 지를 같이 다루었다. 그들의 태도를 아는 것도 이 문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매우 필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 다음에는 해방 이후의 반대자와 찬성자를 다루었다.

△찬성자: 나운영, 박재훈

△반대자: 구두회

아마 한국 교회음악사에 전통음악적 교회음악을 가장 강조한 사람은 나운영일 것이다. 박재훈도 이론적인 면에서는 매우 강하게 찬성하는 편이었다. 반면에 거기에 대해 가장 반대한 사람은 구두회였다. 

그들 이후 세대들이 보여주는 전통음악과의 관련성 문제는 <최근 음악가들의 경향>으로 묶어 한꺼번에 다루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전체를 살펴보는 부분을 마련하였다.

 

2. 역사적 찬반의견 

(1)복정채

1899년의 감리교 『찬송가』 서문은 한국 사람들이 서양의 교회음악을 만나서 어떻게 보았는 지를 알게 한다. 한국인과 서양교회음악의 만남은 조금 혼란스러운 것이었다. 서문을 쓴 사람은  "복졍채"였다. 그는 서문에 죠원시(趙元時 George A. Jones) 선교사가 자신에게 서문을 써달라는 부탁을 받고 "우매 구루함을 도라보지 안코" 글을 쓰게 되었노라고 말한다. 왜 죠원시 선교사가 자신이 쓴 영어 서문을 한국어로 번역하지 않고 한국인에게 맡겼는지 알 수 없다. 이 복정채의 서문은 이전 판의 『찬미가』에는 들어 있지 않은 것이었고, 또한 그 이후의 판에서는 없어진다. 한국인이  찬송가 서문을 쓴 것은 기독교 한국 선교 초기에는 예외적 현상이었다. 그 이전과 이후에 나오는 찬송가책들의 서문들은 거의 선교사들에 의해 쓰여졌다. 어찌 됐든 이런 면에서 이 『찬미가』는 초기의 찬송가 중 예외적인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1). 하지만 이 서문이 나중 판에 나타나지 않았다는 사실은 여기에 대한 반응이 별로 탐탁지 않았던 것으로 여겨진다. 이 서문 내용은 한국의 전통음악에 대해 잘 아는 한국인의 글을 보여준다. 하지만 그 내용은 기독교 역사와 신학을 잘 익히지 않는 상태에서 나온 것으로 보인다.

 "찬미하난 법이 근본 사람에게서 니러난 거시 아니오 신약 성경에 긔록하대 예수 크리스도끠셔 동양 셔편끗 유태국 벳레헴에 탄생하시던 날 밤에 텬사가 뻿레헴 근쳐 들에 양치난 목쟈의게 나려 구쥬 강생하신 아람다온 음셩을 젼하고 또 뭇 텬군이 잇서 텬사와 갓치 하나님끠 찬미하엿사니 찬미 노래난 근본 텬사가 사람의게 가라친 것시오 사람이 시작한바ㅣ 아니니"

 이 글은 찬미의 근원을 성경에서부터 찾으려고 한다. 그러나 구약은 없는 것으로 하고 신약에 나오는 성탄 때의 천사찬송이 그 시작이라고 본다. 이 글은 찬송이 무엇인가 하는 것보다는 찬송의 시작이 어떠했다 하는 것을 글의 시작으로 삼았다. 이는 한국을 포함한 한자 문화권에서 보는 음악서들이 보여주는 책의 서술 방법과 매우 흡사하다. 이 글의 저자는 곧 그런 서적에서 많이 볼 수 있는 내용을 소개한다.     

"또 동양 음률은 즁국 신농씨 처음 지셧고 요 슌 우 삼 셩인이 다 음률을 지어 팔음이 차례랄 일치 아니하야 신과 사람이 화하게 하셧고 우리 나라인즉 긔자ㅣ 동으로 오실 때에 즁국으로서 음악을 가져오시고 우리 대한인즉 세종대왕끠옵셔 즉위하신제 십오년에 팔음을 지으샤 지금까지 젼하샤 사람의 마암을 화평케 하고 깃분 흥을 도도야 신을 화하게 하엿사나 이난 다 사람의 노래 아니오 금 셕 사 쥭 포 토 혁 목 여닯 음셩이니 손가락과 입셜에  운동하난 재조로 나난 거시라"

여기에서 말하는 동양 음률이 앞의 천사 찬송과는 완전히 분리되어 서술되어 있다. 그런데 여기에 나오는 음악은 주로 기악을 가리키고 있다(팔음). 이 부분은 기독교적인 내용과 분리되어 있다, 그러나 성악을 설명하는 부분에서는 다시 기독교와 연결된다.

 "므랏 노래라 하난거산 사람의 마암 속에 잇난 거시 소래에 발하나니 뜻이 잇살 때에난 말하고 슬흘 때에난 울고 깃불 때에난 웃고 즐거울 때에난 노래하나니 우리가 하나님의 넓으시고 무한하신 사랑과 예수 크리스도씨의 우리 죄랄 대쇽하시고 우리로 하여곰 다시 살개하신 은혜와 셩신끠셔난 우리 마암을 돌니켜 악을 바리고 션으로 향하게 하야 하나님과 사람이 화합하게 하시난 능간하심을 내 마암에 깨다라 알고 참 깃분 마암으로 그 은혜랄 감샤 찬숑하난 말로 팔음에 쟝 단 고 져 쳥 탁을 졀됴 잇게 노래하야 하나님끠 드리난 거시라 만일 사람이 하나님 은혜랄 닛고 자긔의 힘만 밋으면 마암 속에 모든 악념과 정욕이 벌떼 갓치 니러나나니 그 잡심을 품고 다만 입으로만 찬미하면 하나님이 드라시지 아니하시나니 찬미할 때에 참 마암으로 하나님이 드라시지 아니 하시나니 찬미할 때에 참 마암으로 하나님 압희셔 할지니라"

 처음 부분에 나오는 "므랏 노래라 하난거산 사람의 마암 속에 잇난 거시 소래에 발하나니"는 악학궤범의 서문과 대단히 흡사한 내용이다. 그러나 노래하는 이유가 다르다. 즉 하나님의 사랑, 그리스도의 대속, 다시 살게 하신 은혜, 성신의 능력을 깨달아 알게 되어 "참 깃분 마암으로" 노래하게 된다고 말한다. 이는 당시에 선교사들이 말하는 찬양론과 흡사하다. 인간적인 잡심을 품고 하는 하나님 찬미는 하나님이 듣지 않으시나, 참 마음으로 찬미하면 하나님께서 들으신다고 말한다.      

서문의 뒷부분은 서양 선교사들이 와서 교육을 해주는 등의 좋은 일을 하는 것은 다 그리스도를 믿는 마음에서 나온 것이라고 말하고, 우리도 부지런히 전도하고, 찬미가를 널리 부르자고 말한다.        

위의 글은 한국음악에 익숙한 사람이 서양식 교회음악을 만나서 동양식 음악론을 교회음악과 결부시키고 있다. 그가 가진 동양식 음악론은 그만이 가진 특유의 것이 아니라, 옛 문헌들에서 익히 보는 내용들이다. 그리고 교회음악론도 그가 가진 독특한 것이 아니다. 따라서 말하는 사람의 개인적 의견은 전혀 실리지 않고 있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복정채는 서양의 교회음악에 관해 우호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는 것만은 틀림없어 보인다.

 (2)길선주(吉善宙, 1869.3.15 - 1935) 

1907년 한국 최초의 교회 부흥운동을 일으켜 오늘날 한국 교회의 모습에 큰 흔적을 남긴 길선주 목사의 교회음악관은 전통음악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길선주 목사 역시 복정채와 비슷한 방식으로 음악과 교회음악에 대해 말한다. 하지만 그는 기존의 한국적 음악론과 서양에서 새로 들어온 교회음악론을 있는 그대로 -복정채처럼- 나열하지 않고 자신의 생각으로 동양적인 것과 서양적인 것을 융합시킨다. 그는 「찬송의 능력」이라는 제목의 설교 요약문을 남겼다.2) 같은 내용이 그가 쓴 『음악대해』(音樂大海 1923)의 서문에도 나타나 있다.3) 그 내용은 매우 단순한 것이지만 그가 보인 음악에 대한 태도를 뚜렷하게 드러낸다. 

길선주 목사가 말하는 "찬송"은 "음악"과 같은 의미이다. 그러니까 그가 말하는 "찬양의 능력"은 "음악의 능력"인 것이다. 이렇게 말할 수 있는 것은 그가 소개한 찬양의 능력 중에서는 성경에 나타난 사건도 있지만, 한국과 중국의 고사를 소개한 것도 있기 때문이다. 그는 

△옥보고가 거문고를 타니 검은 학이 날아와 춤을 춘 것, 
△신라 신문왕 때에 만파식적(萬波息笛) 소리에 병이 낫고, 비가 내리고 멈춘 것,
△장량(張良)의 퉁소 소리에 초병(楚兵)이 해산한 것,
△제갈량의 거문고 소리에 사마의 군대가 해산한 것

을 찬송의 능력이란 제목 아래 소개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그는 베토벤의 피아노, 엘만의 바이올린, 칼소[카루소]의 노래도 찬송의 능력을 말하면서 같이 말하고 있다. 물론 마지막의 베토벤 이후에 소개된 것은 "음악이야말로 이처럼 신비한 힘을 가진 만큼"이라는 말을 하기 위한 예로 소개된 것이다. 그러나 이 사실은 그의 "찬송" 개념이 "음악" 개념과 같다는 사실을 확인해 준다. 

그가 말한 것중에 교회음악 특유의 테두리에 넣을 수 있는 것들은 

△귀신을 쫓는 능력으로 소개된 다윗의 금성(琴聲),
△엘리사의 거문고 소리를 듣고 성령의 감동을 받은 것,
△쌩키의 성악(聲樂),
△다윗의 찬양대,
△요한계시록에 나타난 이십사 장로, 네 영물, 천천만 천사들의 찬송

과 같은 것이 있다. 하지만 이런 음악들이 다른 동서양 음악과 모두 혼합된 상태로 얘기된다. 길선주에게서는 음악과 교회음악이, 동양음악과 서양음악이 같은 것이었다.  

한편으로 길선주 목사는 전통음악을 교회에 끌어들이기 위해 노력했다. 그의 아들인 길진경 목사가 쓴 글에 의하면 1909년에 길선주 목사가 이름 있는 악사들을 그가 시무하던 평양의 장대현 교회에 초빙하여 "교회 의식에 맞는 가락과 그 가락에 맞는 성경구절을 선택 연구하는 데에 힘을 쓰는 한편, 교회명절과 특별행사 때마다 연주해서 교회의 아악에 대한 향심을 부추겼다"고 한다. 길목사는 이러한 음악이 수입된 찬송가들을 대체하기를 바랐고 이를 위해 상당한 돈을 투자하였으나 편곡을 할 수 있는 사람이 없어 포기하고 말았다고 한다.4) 그 이후 길선주 목사는 서양식 교회음악을 받아들여, 한국 최초로 성가대를 자신이 담임하고 있던 평양 장대현 교회에 도입한다(1913년 또는 1914년).  또한 한국 전통음악으로 교회음악을 만들고자 했던 길선주는 청북 수심가 곡조에  맞춘 추풍석음가(秋風惜陰歌)의 가사를 남기고 있으나 악보가 같이 실리지 않아서 어떠한 곡인지에 관해서는 알 수 없다(예수교 회보 1912.10.25)). 가사 내용은 전도자로서의 심정을 노래한 것이다. 

길선주 목사가 우리 문화에 대해 가졌던 생각을 길진경은 다음과 같이 전한다.

"오늘 우리는 우리의 민족문화와 외국문화와의 갈등이 시작된 현실에 살고 있는 것이다. 만일 이 갈등을 극복하지 못한다면 장차 우리의 문화를 상실하는 예언이 될 것이다. 특히 교회는 흥왕하고 있으나, 우리의 문화를 망각하고 우리의 예술을 도외시한다면 멀지 아니해서 교회가 교회인지 구별할 수 없는 집단으로 화할 우려가 있는 것이다. 외국문화와 우리의 문화의 교차로가 된 오늘의 교회가 외국문화의 산실의 전제적인 그림자가 되어서는 아니 될 것이다."6)

물론 이러한 언어는 아들을 통해 전달된 것이기 때문에 어느 사실과 다를 수도 있다. 하지만 그가 한국전통 문화를 생각하고, 그것을 교회에 접목시키고 노력한 것은 대체적으로 사실일 것으로 판단된다. 그가 한국 교회에 새벽기도를 도입한 것은 한국문화와의 접목에서 비롯된 것이다. 또한 그가 최초로 시작한 통성기도 역시 한국적 교회문화를 대변하는 것이다. 이런 점들로 보아서 그가 상당히 한국적인 교회를 성취한 것만은 사실이기 때문에 그가 음악적으로도 '한국적'이려고 했으리라는 것은 대체적으로 수긍이 가는 내용이다. 

 (3)선교사들

①게일

아마 한국 전통음악으로 한국 교회의 음악을 만들어 보려고 했던 사람 중 가장 잘 알려진 사람은 캐나다 선교사 게일(James Scott Gale, 한국명: 奇一, 한국거주:1888-1928)일 것이다.

그는 한국인이 서양노래를 즐겁게 잘하는 것을 인정하였으나 이것이 마음 깊숙한 곳으로부터 나오는 것이겠느냐 하는 것이냐 하는 데에서는 의심을 했다.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한국인들이 가능한한 한국 민요적 성격을 가진 찬송가를 가져야 한다고 생각했다.7) 

게일이 편집 책임자로 있었던 『그리스도 신문』 1901년 5월 9일자에는 「대한 뱃사공의 노래」라는 제목 아래 실려 있다.8) 거기에는 이 노래가 "대한" 사람들의 노래인 것을 분명히 밝히고 가사만 교회적으로 새로 붙인 것으로 밝혀져 있다. 당시 『그리스도 신문』의 음악 기사를 거의 썼던 게일이 그 가사를 붙였던 것으로 추측된다. 한편 그는 "現用하는 讚頌曲調가 朝鮮詩歌에 適用하지 못함을 遺憾으로 녁여서" 1917-19년까지 한국음악연구소를 만들어 한국음악에 관한 연구를 했다고 한다.9) 그 연구내용에 관한 것은 잘 알려지지 않았다.

 ②그로브/ 밴 버스커크

1915년에 나온 백부인과 안부인 편찬의 『창가집』 제2부 제10번곡 Old Hundred(「삼위를찬숑함」. 이 곡은 오늘날도 찬송가 1장으로 널리 불리는 「만복의 근원 하나님」) 찬송가가 조금 "틀린" 방식으로 기록되어 있다.10)  

그런데 이 곡을 "틀리게" 기록한 선교사 그로브는 다음과 같은 각주를 달아 두었다. "이 편곡에는 모든 반음들을 없앴다. 그리고 선율은 대부분의 한국 기독교인들이 부르는 방식과 유사하게 만들었고, 거기에 따라 화성도 원래의 곡과 다르다." (This rearrangement leaves out all half-steps, and in melody resembles that already used by the majority of our Korean Christians. the harmony necessarily differs from that of the original tune.)

그로브가 이렇게 틀리게 음악을 만든 이유를 한 잡지에 기록하고 있다.11)

그로브 목사는 한국에 처음 와서 한국 사람들이 자기들 방식으로 찬송가를 마음대로 부르는 것에 매우 실망한다. 그러나 삼년의 한국 체류 후에 생각이 조금 바뀐다. 즉 "한국사람들은 결코 비음악적인 사람들이 아니고, 음악적"인 사람들이라고 생각이 바뀐 것이다. 단지 서양인의 관점에서 보아 그들이 음악적이라고 생각되지 않을 뿐이라고 말한다. 그는 한국 사람들이 반음 없는 노래는 완벽하게 부른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우연히도 나는 그들이 흠 하나 없이 완벽한 멜로디를 부르는 것을 들었다. 그것은 내게 엄청난 충격이었다. 그 노래는 ‘Auld Lang Syne’의 멜로디였다. 내게 그렇게 감동을 준 노래는 일찍이 들어본 적이 없었다. 이 사실을 자세히 분석해보고 나는 이 노래에 반음이 없다는 사실을 알아냈고, 이것은 내게 계시의 큰 파도처럼 다가왔다." 그리고 칠음음계는 잘 부르지 못하고 오음음계는 잘 부르는 한국 사람들을 위해서는 칠음음계 찬송가를 더 많이 싣고 있는 찬송가책이 잘못 되었다고 말한다. "한국인들은 우리가 칠음음계를 들었던 것처럼 태어날 때부터 5음음계 밖에 못들은 것이다. 잘못은 찬송가책에 있다." 그는 "한국인들은 그들의 천성과 타고난 음악성으로 노래부를 것이다. 우리는 그들의 땅에서 그들을 만나며, 그들이 아름답고 자발적이고 애정 어린 순수함으로 회중의 노래를 만들 수 있게 도와주어야 한다”고 말한다.

같은 잡지에서 선교사 밴 버스커크 역시 비슷한 방식으로 한국인들이 부르는 오음음계적 찬송 부르기를 옹호한다.12) "당신이 만약 한국 교회의 예배에서 우리들의[서양의] 찬송가들을 열정적이지만 아주 잘못되게 부르려고 하는 것을 본다면 아마 당신은 그것은 그들이 음악을 전혀 모른다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온당치 않다. 그들 음악을 기준으로 그들의 노래부르기를 판단하라."(If you have been to a Korean church and heard their enthusiastic but very futile attempts to sing our hymns-tunes, you may be ready to say there is no music in them; but that is not fair; judge them by their attempts at their own music."
 

(4)초기 한국 교회의 전통음악 사용(어화노래 외)

한국 교회음악사 초기에 전통음악을 실제로 사용하여 교회음악을 만든 경우가 없지 않다. 이러한 교회음악을 위한 적절한 명칭이 아직 없다. 또한 그 음악이 구체적으로 어떠했는지 알 길이 없다. 단지 가사를 보면 "어화"와 같은 말로 시작하는 경우들이 있어서 그 음악이 전통음악적이었을 것이라고 짐작할 수 있을 뿐이다. 여기에서는 이 노래들을 임시로 "어화노래"로 부르기로 한다. 그 가사의 짜임새는 천주가사와 매우 흡사하다. 현재 남아 있는 가사로는 작사자를 알 수 없는 「전도가」(예수교회보 1913. 7. 22), 주동강(朱東岡)이 지은 「언문전도가」(기독신보 1921. 11. 9)가 있고, 6개의 긴 노래를 담은, 붓글씨로 쓰여진 『앵산전도가』(鶯山傳道歌)가 있다. 이 책은 1915년과 1921년의 두 개의 연도가 쓰여져 있다. 또한 가사(上帝愛世歌) 안에 1915년에 쓴 것이라는 명확한 기록도 담겨 있다. 어화노래는 모두 전도를 위한 것으로 추측된다. 그 내용은 기독교 교리를 자세하게 설명하는 것들인데, 옛 중국과 한국 고사나 말들이 많이 인용되어 있다.  

 또한 민요 박연폭포에  찬송가 가사가 붙여진 것이 있다. 이 가사에는 악보까지 같이 그려져 있다. 비록 리듬기록이 맞지 않은 곳이 많으나 그 선율은 오늘날 부르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음을 알 수 있다. 박화복(朴華福)이라는 이름으로 발표된 이 노래는 활달한 노래에 어울리지 않게  겟세마네 사건을 내용으로 하고 있다(기독신보 1919.3.12).13)  

또한 교회적 가사로 바뀐 전통음악적인 「영생포구」라는 뱃노래가 성가대 음악으로 불린 곡이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즉 1937년 조활용(趙活湧)이 편찬한 『200곡집』에는 "朝鮮古曲集에서"라는 말리 붙어 있다. 노래는 물론 한국 전통음악식이다. 이 성가는 1950년대의 성가집에까지 실려 있으나, 그 후부터는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이렇게 한국 교회 초기에 전통음악과 관련 있는 부분을 찾을 수 있으나 이러한 것들이 많지 않았고, 교회의 주목을 크게 받지 못했다. 

(5)한국인 김씨

1917년에 어떤 외국인이 익명으로 잡지에 기고한 글을 보면, 서양 찬송가를 교회음악으로만 생각하는 '김'이라는 사람의 생각을 읽을 수 있다. 이 글의 기고가는 한국음악에 대한 애정을 가지고 전통적인 우리의 노래를 배워 김에게 들려준다. 김은 당신의 노래하는 모양이 너무 우스우니 다시는 부르지 말라고 얘기한다. 그러자 그 기고가는 반론을 펴기를, 당신은 교회에서 외국의 노래인 우리의 찬송가를 부르지 않느냐고 묻는다. 김이 대답하기를, 그것은 교회에서 부르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 다음에 나오는 대화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14):

 "기고가: 나는 당신들의 음악을 좋아한다. 당신도 우리들의 음악을 좋아하는가?
김: 아니요,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기고가: 그렇다면 왜 그것을 부르지요?
김: 그 노래들이 어디에서나 예배에 적합하기 때문에 부르는 거지요.
기고가: 그 노래가 당신을 울게까지 한 일이나 기뻐 날뛰게 한 일이 있습니까?
김: 당신의 말이 잘 이해되지 않습니다.
기고가: 그 집회에 많은 강퍅한 죄인들이 모여있고, 성가대가 한국말로 '죄인들이여 영접하라'는 노래를 부를 때에 거기에 감동하여 죄를 고백하고 자신들의 길을 바꾸는 일이 있다고 생각합니까?
김: 거기에 감동하다니요, 감동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감동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그것은 예배를 행하게 하는 형식일 뿐입니다."

이 대화내용은 한국의 전통음악이 예배에 적절하지 않다는 생각을 가진 한국 교인의 견해가 부각된다. 그의 교회음악관은 예배와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고, 그는 자신이 부르는 서양찬송가조차 좋아하지 않으나 예배에 합당하기 때문에 교회에서 부른다고 말한다. 

(6)신정 찬송가

한국인이 한국 전통음악으로 교회음악을 만드는 일에 반대한 사건은 「신정찬송가」(1931) 에 드러나 있다. 이 책을 만들면서 한국민요적인 노래의 삽입에 대한 고려가 있었으나 이를 반대한 쪽이 한국인 찬송가 위원들이었다는 사실이 서문에 실려 있다.

"죠선구곡을 찬미로 사용할가하난 문데도 잇섯스나 됴치못한 샤회와 관계가 잇스니 불합하다고 죠선인위원의 반대로 즁지하니라."

신정찬송가를 만드는데 한국인 위원으로는 변성옥(邊成玉)과 김인식(金仁湜)이 참여하였다. 그러나 신정찬송가에는 7명의 한국인 작시의 찬송가가 포함되어 있었다. 그러니까 한국인의 가사는 인정되었으나, 한국의 전통음악만 거부된 것이다.

 (7)구왕삼

구왕삼은 비교적 교회음악과 일반음악에 관해 1930년대에 상당히 많은 글을 남겼다. 그는 우리의 전통음악의 유지와 발전을 주장하였다. 그는 이화여전에서 발간한 『민요합창곡집』에 관한 서평에서」15) 조선음악이 서양음악에 밀리고 있는 상태를 개탄한다. 아악16)은 악사의 배출도, 악곡의 제작도 없으며, 가야금은 화류계의 전용물, 또는 유한계급의 향락물로 전락하여 일반인들은 이를 퇴폐적이고 망국적인 노래로 인식하기에 이르렀다고 한탄한다. 국악은 양악과 피아노, 바이올린, 색소폰에 쫓겨 "멸망의 위기"에 있다고 말하고, 내놓을 만한 조선의 악기가 없다고 말한다. 또 우리의 음악은 원시적인 형식과 빈약한 주법 때문에 발전에 많은 문제점이 있음을 말한다. 

 그는 「방아타령」, 「영산회상」 중 「타령」과 같은 음악의 일부를 3부 합창곡으로 편곡한 것에 대해 신랄한 비판을 가하고 있다. 조선의 민요곡은 본질적으로, 악곡 형식상으로 보아 서양음악과는 다르고 음계의 음이 부족하여 특이하고 여성적인 멜로디를 가지며 화성적 요소가 희박하기 때문에 조선음악의 그 독특한 선율에 대한 감정과 곡을 서양음악의 기보법으로는 도저히 표현할 수 없는데, 3부로 편곡한 의도를 납득하기 어려운 일이라고 말한다. 

  또 우리 우리의 발성법이 서양음악의 그것과 달라서 서양식 기보법으로는 음색, 음질, 음고와 악상, 선율, 감정 등을 드러내기 어려운 까닭에 조선 음악만의 독자적인 기보법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그는 기존의 5음 6율법을 수정하고 개조하여 조선 민요곡을 조선의 민요답게 표현할 수 있을 것이라고 제안하기도 한다.

 덧붙여서 그는 근본적으로 조선의 악기의 개조와 작곡 형식의 개변(改變)이 필요하고 주제의 재신(再新)이 필요하며 그렇지 않고서는 조선의 음악을 서양기보법에 의하여 양악화 할 수는 없을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구왕삼은 어린이를 위한 주일학교 노래와 동요들을 많이 상당수 작곡했는데, 항상 한국 전통음악적 방식만 사용하지는 않았다. 의도적으로 전통음악적이라고 생각되는 곡들은 3박자 리듬과 오음음계를 사용하는 것들이다. 예를 들어  「조선의 꽃」17)이라는 곡이 바로 그런 것이다. 이 곡은 "아이주일기념" 장로회 총회 종교교육부가  발표한 것으로 '민요풍으로'라는 연주 지시어가 있다.

하지만 구왕삼의 이런 생각은 그가 일제 말기에 친일로 기울면서 그의 생각은 후세에 전달되지 못하는 결과를 초래한다.

 

(8)채기은

  1930년대에 목사 채기은(蔡基恩)의 글은 한국 전통음악에 대한 일반 목회자들의 생각을 대변한 것으로 보인다.18) 그의 생각은 찬송과 관련되어 <세속적인 것>을 경계하는 면이  나타난다. 자손들에게서는 찬송만 가르치고 세속음악을 가르치면 안 되고, 찬송을 여흥과 음악회 때에 해도 안 되고, 방송을 해도 안 된다. 이는 찬양이 "제사적 의의"를 갖고 있는 것이기에 그렇다는 것이다. 이렇게 채기은의 교회음악론은 세속음악과의 경계를 뚜렷하게 함으로써 교회음악의 "거룩함"을 지키려고 한다. 그는 골 3:16절의 "신령한 노래"의 의미가 속곡(俗曲)에 맞추는 것을 불가하게 한다고 말하고 "아리랑, 흥타령, 流行 歌曲 等等에 맞춤은 犯聖이 된다"라고 말한다. 물론 그는 여기에서 전통음악만을 말하고 있지 않고 유행음악에 대해서도 교회에 용납될 수 없음을 말한다. 

 

(9)박경호

박경호(朴慶浩)는 『매일신문』 1941년 11월 27일 자에 「謝恩音樂會의 意義」19)라는 제목을 기고하면서 다음과 같은 말을 하고 있다. 

"朝鮮에 音樂文化가 싹트기 시작한 以來 數三의 原因 卽, 音樂을 國定敎科書로 한 以來 基督敎의 影響 等으로 因하야 朝鮮音樂을 無視한 傾向(朝鮮音樂 自體의 缺點도 원인의 하나지만)이 잇다. 此에 對하야 勇敢無屈한 先輩가 李尙俊, 金亨俊, 故 白禹鏞 等 3씨일 것이다."

이 글은 반 서구주의를 지향한 일제 말의 일본정책에 대단히 충실한 내용을 보여주는 일면도 있지만, 대단히 "조선음악"을 강조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물론 그가 조선음악의 결점을 말하는 부분이 없지 않으나 그가 말하는 내용은 조선음악을 옹호하기 위한 것이 틀림없다. 왜냐하면 그가 조선음악을 무시한 사람들과 용감하게 맞선 세 사람을 칭찬하고 있기 때문이다.

박경호는 특히 교회에 조선음악을 도입시키려 했던 김형준을 높이 평가하고 그에 관한 이야기를 꽤나 길게 말하고 있다. 그는 김형준의 의도대로 조선음악을 교회에서 연주하려 했던 자신의 경험담을 다음과 같이 말한다.   

"金亨俊씨는 특히 <基督敎人들이 서투르게 부르는 歐美式 讚頌歌보다는 차라리 同一한 意味의 歌詞에 朝鮮式曲을 導入식힘이 조치 않는냐>는 主張으로 多樣한 朝鮮讚頌歌를 만드러 導入한 結果 一部 □□한 敎役者側에서는 猛烈한 反對가 잇섯다. 그 一例로 筆者가 市內 모 敎會의 音樂을 指揮할 時 金亨俊氏의 此 운동에 공명하야 金氏를 招聘하야 禮拜順序에 朝鮮曲 讚美歌를 合唱한  일이 잇섯다. 特히 젊은 學生들의 감격은 실로 多大하였건만 강단우에 안저잇던 목사가 돌연히 기립 大呼하야 가라사대 <오늘 合唱을 한다기에 許諾하였더니 이런 것인줄은 몰랏소. 이런 소리를 料亭이나 노리터에서나 부를 것이지 神聖한 敎會堂에서는 절대 許容할 수 업소.> 當時의 챙피는 말할것도 업거니와 金씨는 <未嘗不 그럴 것이다>는 듯이 微笑를 챙기고 卽退하시던 光景이 아직도 눈에 서리는 것이다. 神聖한 敎會일수록 讚美의 曲調는 부를 수잇으되 朝鮮音樂을 부를 수 업다는 腐敗한 精神의 所有者가 當時 敎役者中의 大部分이었던 것이다."

박경호는 교회 안에서 조선식 교회음악을 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교역자들을 "부패한 정신의 소유자"라고 말한다. 이는 대단히 강력한 비판이다. 그런데 조선식 교회음악을 반대했던 목사의 견해로는 조선음악이 "料亭이나 노리터에서나 부를 것이지 神聖한 敎會堂에서는 절대 許容할 수" 없는 것이었다. 이런 글을 통해 당시 목회자들이 전통음악에 반대했던 생각들을 우회적으로 읽을 수 있다. 그는 길선주 목사가 담임으로 있었던 평양 장대현 교회의 성가대 출신이었다. 이러한 교회음악적 사고는 길선주 목사의 영향으로 추측된다. 

한편으로 김형준과 같은 사람은 전통음악을 교회에 끌어들이려고 노력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하지만 김형준 자신의의 흔적은 문건으로 밝혀진 일이 없다. 따라서 그가 했던 시도들이 정확하게 어떤 종류의 것이었는 지는 알 수 없다. 

박경호의 글은 당시 일제가 반미적인 생각을 강하게 부추기던 일제 말에 나타난 것이라서 어느 정도 시대사조에 편승하는 글이라는 일면도 있다. 이 글의 끝부분에는 강하게 일본적인 것을 주장한다.:

"知恩의 情은 日本 大國의 資源이다. 知恩의 道가 업시 皇道의 情神과 憂國의 精誠을 探知할 수 업다." 

이러한 그의 친일발언은 조선적인 교회음악의 주장을 무효로 만든다. 반서구적인 생각 하나로 조선적 교회음악을 주장하는 것은 충분치 않기 때문이다. 물론 그가 처음부터 친일적인 사람은 아니었을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그가 30년대에 「조선의 꽃」과 같은 애국적인 어린이 노래를 만든 것들이 있기 때문이다.20) 또한 그의 어린이 동요나 찬송가들은 음악적으로 보아 약간 "조선적"인 내용을 보이는 곡이  있으나21), "서양적"인 것에 비해 더 많이 작곡된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  

 

(10)초기 양악가들

초기의 양악가들은 전통음악적인 방식으로 작곡을 자주 보여주지 않은 경우에도 전통음악에 대해 적대적이었다고 만은 할 수 없다. 예를 들어 김인식(1885∼1962)의 경우는 『신정 찬송가』 편찬 시에 한국인 위원 중에 한 사람이었다. 즉 한국식 음악을 찬송가에 넣지 말자는 위원 중 한 사람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영산회상』을 채보하여 그것을 출판하였다.  

이상준(1884∼1948)의 『조선고가집』(1917)은 우리나라 속악을 서양악보로 옮긴 것이다. 이상준은 그것 이외에도 많은 한국민요를 악보로 채보하여 출판하였다. 전통음악에 대해 부정적인 의견을 피력했던 홍난파는 『조선정악보 3편』(1917)을 출판하기도 했고, 전통음악에 바탕을 둔 신민요들을 작곡하기도 했다. 이태리 성악곡의 아류처럼 들리는 곡들을 작곡한 현재명은 서울대 학장으로 있으면서 학교 내에 국악과를 창설하기도 했다.   

그러니까 초창기 작곡가들은 전통적 음악에 대해 아주 무관심했다고는 말할 수 없다. 하지만 그들의 전통음악에 대한 생각은 제한된 범위 내의 것으로 여겨진다. 즉 그들은 전통음악적 관심 때문에 양악에 더 치중한 자신들의 입장을 수정할 의사는 없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모두 기독교인들이었던 그들은 교회음악의 경우에는 전통음악적인 것을 전혀 시도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들은 또한 교회음악 창작에는 아주 조금 손을 댔을 뿐이었다. 따라서 이들은 서양음악을 선택했다는 말이 더 맞을 것으로 보인다. 홍난파가 1913년 4월 조선정악전습소에 원래 한국 전통음악을 배우러 갔다가 서양악부(성악과)로 진로를 바꾼 것을 많은 상징성을 담고 있다. 홍난파는 서양음악에 우선권을 두었다. 

 

(11)나운영

나운영은 아마 민족적 교회음악을 가장 강하게 강조한 작곡가에 속할 것이다. 그는 단지 말만 그렇게 한 것이 아니었다. 그는 작품을 통해 그의 생각을 현실화시키려고 대단한 노력을 기울였다. 그는 서양식 음악만이 교회음악이라고 보는 견해에 대해서 반론을 제시한다. 그의 (교회)음악관은 "선토착화 후현대화"(先土着化 後現代化)라는 구호를 통해 잘 드러난다. 이는 기존의 서양식 교회음악을 극복하려는 그의 생각을 유감없이 드러내는 구호이다. 그는 이런 말을 하고 있다. 

"바로크 양식이나 클래식 양식의 것이 보다 종교적이고 그런 양식으로 된 작품이어야만  경건하고 심오해서 교회음악이라고 말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던가, 서양의 근대적 양식이나 현대적 양식으로 작곡된 것은 보다 세속적이고 더욱이 한국적으로 작곡된 것은 성스럽지 못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교회음악과 세속음악을 혼동하거나, '교회음악의 현대화와 곧 세속화를 의미한다22)'고 단정하려 드는 어리석음과 고집에서 오는 그릇된 판단임을 알아야 한다." 

이 인용문에서 중요한 점은 그가 한국 전통음악을 세속음악의 카테고리에 넣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러한 생각은 실제로 나운영이 지향하는 바와 가장 반대되는 생각들을 강하게 밀어내고 싶어한다. 왜냐하면 한국 전통음악이 교회 안에서는 주로 세속음악으로 -즉 광대, 무당, 기생의 음악으로 이해되는 상황에서- 그것을 "어리석음과 그릇된 판단"이라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현대음악은 더 경건하지 못하다고 하는 생각에 대해서도 강한 반론을 폈다. 

<현대음악가>와 <교회음악가>, 이 두 종류의 음악가를 한 몸에 지니고 있는 나운영은 "선토착화 후현대화"(先土着化 後現代化)라는 구호로 자신의 음악적 목표를 설정한다. 이 구호에서는 토착화가, 즉 음악의 민족적 구현이 현대화에 우선하는 것임을 말하고 있다. 한국에서의 민족주의는 <강한 어조>도 포함한다. 그는 <현대화>냐 <토착화>냐의 이중적 강조점에서 토착화에 더 힘을 실어 주었다.23) 나운영이 50년대부터 대단히 전통음악을 강조한 음악을 작곡하면서도 <토착화>를 <현대화>보다 더 전면에 내세운 것은 70년대부터이다. 그가 <현대화>를 덜 중요시하게 된 것은 그가 어느 면에서 대중화된 음악을 상당히 염두에 두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그의 "토착화" 음악은 주로 찬송가 창작을 통해 드러난다. 1600여곡에 달하는 그의 찬송가들은 <선토착화>라는 강한 집념의 소산이다. 그는 이를 위해 자신만의 화성이론("한국화성")도 개발했고, 다른 전통음악의 자료들을 -예를 들어 '장단'- 많이 활용하였다.   

 

(12)박재훈

교회음악가 박재훈은 원래 전통음악에 별 다른 관심을 갖지 않고 교회음악을 창작하였다. 40년대 말에서 60년대 초까지 그의 교회음악관은 신앙적이고 영적인 측면을 강조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가 1964년에 쓴 『한국교회와 찬송가』24)라는 글에서는  전통음악을 교회음악화하는 일에 관심을 표시한다. 

"수일 전 나는 어느 전차간에서 전부터 내가 존경해 오던 모 장로님을 우연히 만난 일이 있다. 약 5, 6분밖에는 함께 이야기할 수는 없었으나 그날 그 분이 무심코 내게 던져 준 화제의 실마리는 오늘과 장래에 있어서 내가 많이 공부해 나아가야 할 숙제라고 생각한다. 그 분의 이야기는 이렇다. 즉 얼마 전에 우연한 기회가 되어 자신도 생전 처음인 무당 굿하는 것을 구경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무당의 주문 외는 것, 북 치는 것, 그 독특한 리듬, 그 표현의 강약 등이 신통하게도 우리의 정서에 꼭 들어맞는 것을 알게 되어 그 분 자신이 크게 놀랐다는 것이다. 그것이 샤마니즘의 한 표현임을 잘 알고 있으나 한국의 교회음악의 앞으로의 방향이 역시 이러한 소재를 버리고 천시할 것이 아니라 도리어 잘 이용해서 우리 민족 고유한 찬송 내지 예배음악을 만들어 낼 수 있지 않겠느냐는 이야기였다." 

박재훈은 -나운영과는 다르게- 우리의 전통음악이 세속성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본다. 그는 전통음악이 샤마니즘에 의해 사용된 것을 숨기지 않고 말하고 있다. 그는 그 후로 위와 같은 과제를 마음에 품고,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도를 모색한다. 그는 한국교회가 기독교 2000년 역사에서 다른 나라에 결코 뒤지지 않는 훌륭한 역사를 가진 것을 자랑스럽게 여기지만, "우리에게서 산출된 이 위대한 신앙의 역사를 뿌리한 찬송이 아직도 산출되지 못했음"을 부끄럽게 생각한다. 그는 하나님 보좌 앞에 상달되는 "장엄한 찬송의 울림" 속에 "우리 민족 고유의 독특한 리듬과 선율과 화성의 옷을 입고 이룩된 한국의 찬송이 하나의 테마로 등장하여 세계 아니 우주 찬송의 벅찬 반렬 속에 참가하고 있는가?"하고 묻는다.  

박재훈의 실제 음악은 과도하게 전통음악적 자료를 사용하지 않는다. 그는 그것을 5음응계나 한국적 리듬이 생각나게 하는 정도 사용한다. 한국적 화성은 아주 드물게 본다. 그것도 나운영이 이미 쓴 방식(예를 들어 4도, 5도 병행)을 곡의 어느 부분에서 잠깐 사용하는 정도이다.  그는 전통음악적 요소를 서양음악 작곡 방식 안에 용해시킨다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그의 음악 방향은 현재 한국에 가장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다. 즉 그의 교회음악에 대한 교회의 반응에는 거부감이 별로 없다. 이는 나운영의 음악이 아직도 미래를 기다리고 있는 것과는 좋은 대조를 이루고 있다.

 (13)구두회

전통적인 한국음악을 교회에서 사용하는 것에 대해 가장 반대하는 대표적 음악가로는 구두회가 있다. 그는 거기에 관한 체계적이고 이론적인 글을 쓴 것은 볼 수 없지만, 한 좌담회에서 그 생각을 뚜렷하게 드러낸다. 그는 우리 민요에 교회적 가사를 붙여쓰고자 한 시도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리나라에는 향락적인 음악은 있었지만 종교적인 음악은 없어요. 그 근본부터 다른 것을 음악화하려면 언어도단이에요. 기독교에 대한 망발입니다."25) 그는 이 말을 인도음악에는 종교적인 음악이 있어서 기독교가 인도음악을 사용해도 별 무리가 없으나, 한국에는 그런 음악이 전혀 없다고 하면서 한 말이다. 

구두회는 한국 전통음악과 무속신앙과의 관련성을 강조하기도 한다:

"韓國的인 文化는 모두 韓國 古來의 土俗的 信仰에 뿌리를 두고 發展해온 土俗 文化이기 때문에 이러한 素材들을 活用하는 것은 世俗音樂에서는 얼마든지 强調하고 主張하여야 하는 일이지 만은 교회음악에서는 절대로 제멋대로 분별없이 수용하여서는 안 되는 文化요 傳統입니다. 그 이유는 이 모든 文化的 素材들이 巫俗信仰에서 발생하여 자라온 다시 말해서 雜神을 섬기는 祭具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文化的 素材들은 모두 "가이사의 것"이며 결코 "하나님의 것"이 아닌 것임을 우리 한국 교회의 지도자님들은 분명하게 알아야 합니다."26) 

그러나 바로 이 인용문은 위의 인도음악을 언급하는 글과는 모순적 관계에 있다. 왜냐하면 인도음악은 "종교음악"으로, 한국음악은 "무속신앙"으로 표현되면서 전혀 다른 가치평가를 받고 있기 때문이다.    

 (14)최근 음악가들의 경향

나운영과 박재훈 이후에 오는 한국 교회음악작곡가들 중에는 전통음악적 요소를 강조하는 사람들이 많아진다. 작곡가이자 목회자인 문성모는 그것을 가장 강하게 주장하는 젊은 세대에 속한다. 그의 음악은 한결 더 국악과 가까운 것이지만, 그렇다고 전통음악 그대로를 수용하지는 않는다. 그는 교회의 반주 악기로 오르갠이나 피아노를 받아들이고, 거기에 적절한 국악적 화성을 보여준다. 그의 찬송가에는 나운영의 현대성과 같은 측면이 없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쉽게 부를 수 있다. 

한편으로 순수 국악이거나 거기에 가까운 교회음악들을  음반과 악보집을 통해서 보급하려는 노력이 황대익 목사(국악선교회, 창립: 1984)를 통해 시도되었다. 여기에는 국악을 전공한 사람들이 많이 참여했고, 그 의도에 동감하는 양악 작곡가들도 함께 작업했다. 하지만 근래에 그 활동이 중단되었다. 지금은 문재숙(예가회)을 중심으로 황대익 목사가 펼쳤던 것과 비슷한 운동을 펼치고 있다. 그러나 국악 전공자들의 순수 전통음악적이거나 유사전통음악적인 방향의 음악은 교회 안에서 크게 퍼져 있지는 않다. 

한편으로 김국진, 나인용, 오소운,  이건용, 이영조 등이 그런 경향을 보인다. 그런가 하면 꼭 한국적인 것을 주장하지 않을지라도 가끔 '한국적 음악'을 쓰는 경우도 상당수 있다. 한국적인 성격의 음악을 절대적으로 안 된다고  배격하는 음악가는 근래 들어 매우 적은 수이다. 아직도 소박하게 오음음계나 삼박자를 통해 한국적이려고 하는 경향은 많은 교회음악 작곡가들에게서 볼 수 있다. 오히려 그렇게 쓴 일이 없는 사람을 찾아보기가 더 어렵다.

3. 마치면서

위에서 살펴본 바에 따르면, 한국에 기독교가 들어온 이래로 전통음악과의 문제들이 끊임없이 인식되어왔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하지만 한국 전통음악으로 교회음악을 만들겠다는 생각이 교회에서 일반화되지 못한 실정으로 보아, 전통음악과 관련된 교회의 부정적 사고가 매우 컸다는 것을 짐작케 한다. 특히 무속과 기생 그리고 광대를 전통음악과 연관시키는 사고는 매우 역사가 깊다는 것을 우리는 위에서 확인할 수 있었다. 전통음악과 관련된 이러한 생각들은 전통음악이 교회에 들어오는 일을 가장 강하게 방해한 요소로 보인다. 특히 음악가에게서보다는 목회자들의 입장이 이 부분에서 더 조심스럽다. 박경호가 전통음악적 교회음악을 허락하지 않은 목회자들을 "부패한 정신의 소유자"라고 한 말은 오늘날도 많은 목회자들에게는 부당하게 느껴질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니까 박경호가 한국 최초의 성가대로 참여했던 장대현 교회의 길선주 목사의 생각은 목회자들의 사고로는 매우 이채로운 것이라 할 수 있다.   

한편 해방 이전에 전통음악적 교회음악을 주장한 음악가들조차도 전통음악을 통해 교회음악을 실제로 창작하는 일에 열심이었다고 볼 수 없다. 그러니까 마음은 있었으나 그 생각을 실행에 옮길 수 있는 힘이 현저하게 부족했다고 말할 수 있다. 이런 실정은 아직도 계속되고 있다. 마음으로는 한국적인 교회음악을 세우고 싶으나 그것을 추진하는 힘은 매우 약했다. 또한 그런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교회에서 다수를 이루지 못하고, 개별현상으로 남아있었다는 것도  문제점이었다. 

강한 흔적은 남긴 사람은 나운영이다. 그의  칸타타, 성가독창곡들, 그리고 1600여곡의 찬송가들은 그 증거물들이다. 그러나 그는 -교회음악 분야만을 놓고 볼 때에- 상당한 정도로 실험성과 예술성이 강한 편이어서 교회의 전반적인 호응을 받지 못하였다. 또 많은 사람들에게 통용되는 교회음악을 지향하는 사람들에게 그는 전통음악적 성격을 필요 이상 지나치게 강하게 드러내는 음악가였다.

현재 전통음악적 성격을 가진 교회음악으로 교회에서 날리 통용되고 있는 음악들은 몇 가지 전통음악적 리듬요소 -예를 들어 삼연분음표, 긴음+짧은 음, 짧은 음+ 김 음- 그리고 전통 서양식 화성을 붙인 곡들이다. 예를 들어 박재훈의 찬송가 「지금까지 지내온 것」 정도이다. 그리고 현재 작곡되는 찬송가들은 이런 정도의 전통음악적 성격들을 드러내고, 이 런 정도의 찬송가들은 현재 대단히 많은 양이 작곡되고 있다. 

그러나 이보다 조금 더 앞으로 나간 전통성을 가진 음악들, 예를 들어 전통 장단을 사용하는 음악들은 그보다 환영을 덜 받는다. 이렇게 전통적 장단을 바탕으로 한 찬송가들은 기피되는 것을 많이 볼 수 있다. 이는 장단이 들어오게 될 때에 전통음악과의 관련성이 더욱 확연히 드러나기 때문으로 여겨진다. 하지만 이런 음악들은 성가대를 위한 합창곡에서 많이 볼 수 있다. 특별히 일정한 절기(예를 들어 추수감사절)를 위한 것들이 비교적 많이 눈에 띈다. 그러나 다른 절기나 일반 성가곡에서는 이런 종류의 곡이 그리 쉽게 눈에 띄지 않는다. 자주 불리는 한국인 창작의 곡들이 더러 있지만, 그런 곡들에서는 전통음악적인 성격이 거의 없거나 아주 약하게 드러난다.

길선주 목사의 예언대로 한국교회는 자신의 문화를 상실한 교회가 되었는가? 표면적으로는 그렇게 보인다. 하지만 전통음악적 요소를 지닌 음악들은 -연주가 자주 되지 않아서 그렇지- 사람들의 눈에 별로 띄지 않으면서도 계속 자라고 있다. 그 문화는 죽어 있지 않다. 단지 잠자고 있다. 물론 한국교회음악은 한국 전통음악 그대로를 옷입고 잠에서 깨어나지 않을 것이다. 그러기는 대단히 어려우리라. 한국음악의 전통적 문화는 일정한 요소로서 새로운 옷을 입고 나타날 것이다. 그리고 그 음악은 교회적으로 의미변화를 이룬 것이어야 한다. 이런 일에 힘을 쏟는 사람들은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다.    

각주 
1)  1908년 무곡조 『찬숑가』 책에는 짤막한 서문이 있는데, 이 것을 누가 섰는 지는 기록되어 있지 않다. 여기에는 공자도 노래했다는 말이 나온다. 이 내용은 선교사가 한국문화에 접근된 말을 사용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이 서문은 한국 사람의 것으로 보기 어렵다.  
2). 길선주 목사 예화 모음, 기독교문사 1994. 234-235쪽. 
3) 한영길/박경호: 音樂大海 평양 1923,
4)  길진경: 『靈溪 吉善宙』종로서적, 1980 p.218. 이 책에서 말하는 ‘아악’이 어떠한 것인지는 분명하지는 않으나 아마 ‘정악’이나 ‘궁중악’에 가까운 것이리라 여겨진다. 왜냐하면 저자가 ‘아악’과 ‘창극’을 다른 곳에서(p.212)구분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길선주 목사는 도움이 된다면 불교적 음악과 무용까지도 수용한 모습을 보여준다(1918년 장대현 교회의 성탄절 전야에는 아악 연주와 여승의 북춤이 있었다는 것이다. p.268)
5).[교음사료1.72]
6)  길진경(각주 3의 책)p.253.
7) The Korean Repisitory 1896. 9. p.377.
8). 악보는 "배 떠나간다"(Boaet Song) 제목 아래 백부인/안부인 편찬의 『창가집』(1915) 제1부 19쪽에 실려 있는데, Music by P. L. Grove라고 되어 있다. 이로 보아 그로브는 이미 있는 "대한 뱃사공 노래"에 화성만 붙인 것으로 여겨진다. 같은 악보가 기독신보 1917년 6월 20일자에 실려 있다[교음사료1.55.] "교음사료"는 <한국교회음악 사료집(韓國敎會音樂 史料集) 제1권:1992,제2권:1993,홍정수 편, 장로회신학대학 교회음악연구원,>을 가리킨다. 이 곡은 "소아회 창가"라는 제목 아래 또 다른 가사가 붙여지기도 했다(예수교회보 1913.7.15).
9) 奇一博士 略歷 ↗기독신보 1937. 2. 24.
10) 安婦人(Mrs. Baird)/白婦人(Mrs. Becker) 편찬: 『창가집』 야소교회서관(평양) 1915. 제2부 16쪽.
11) Paul L. Grove: Adequate Song-Books ↗The Korea Mission Field. 1915. 4. p. 110
12)J. D. Van Buskirk: Old Korean Music  ↗The Korea Mission Field. 1915. 4. p. 100.
13).[교음사료1.161]
14) E.T.: Music ↗The Korea Magazine 1917 April. p.160ff [교음사료2.132ff]
15). 조선일보. 1931. 8. 10. 
16). 여가에서 말하는 "아악"이란 궁중음악을 두고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17). 종교시보. 1934년 6월호에 기재. 이승원 작사. 같은 가사를 박경호가 작곡한 것도 있다(현재명: 아동 성가집. 장로회 총회 종교교육부 1936)
18) 찬송에 대한 성경적 고찰 ↗신앙생활 제7권 제9호, 1938. 10월호, 평양 신앙생활사, 19-23쪽.
19) 이 글은 이상준, 大場勇之助, 김형준, 김인식의 음악적 공적을 기리는 음악회를 열면서, 그 의의에 관해 쓴 글이다. 이 글은 음악학연구회 편찬 『음악학 5』(민음사 1998. 124-126쪽)를 참조했다. 
20) 현제명: 아동찬송가. 장로회총회 종교교육부 1936. 11장.
21) 위의 책. 45장.
22). '교회음악의 현대화와 곧 세속화를 의미한다'에서 "곧"이란 말이 없어야 그의 생각이 더 뚜렷해질 것으로 보인다.
23). 나운영이 "선 토착화 후 현대화"의 구호를 사용하는 것은 70년대부터이다. 참조  홍정수: 나운영의 음악관, 그의 민족음악론을 중심으로 ↗음악과 민족 제20호 1995. 142쪽.
24). 한국교회와 찬송가 ↗기독교사상 1964. 10월호. 40쪽 이하.
25) 크리스찬 신문 1976. 6. 5.
26) 구두회: 한국 찬송가 공회에 보낸 편지 1999. 5. 30. 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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