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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헤나우의 헤르만 [Hermann von Reichena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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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헤나우의 헤르만 (Hermann von Reichenau, 혹은 Hermannus Contractus, Hermann Contractus, 1013-1054)

중세기 음악사 특히 르네상스 이전의 음악사에 나타나는 인물 중에 Hermannus Contractus 라는 인물은 우리에게 별로 알려지지 않은 인물이다. 그의 이름 중의 "Contractus"는 라틴어로 "좁다, 가늘다, 눌렸다"등의 뜻도 있지만 "마비되었다"는 뜻으로도 쓰인다. 이름이 말해 주듯이 그는 지체 마비 장애자로 독일의 역사가들은 그를 "Hermann der Lahmer"라고도 부른다.

그는 저 유명한 아레쪼 귀도 (Guido d'Arezzo: 아레쪼 사람 귀도라는 뜻)나 노트커 발불루스(Notker Balbulus: 말더듬이 노트커라는 뜻)와 같은 시대 사람으로 당시의 음악을 체계화하는 이론 발표와 새로운 음정 표식 법의 제정, 그리스 음악에서 기인한 옥타브 음계의 새로운 분석, 그리스 음명을 배제하고 간단한 알파베트의 사용 등으로 중세음악 이론을 체계화한 인물이다. 물론 그의 새로운 음악적 사고방식이 귀도나 베르노등 다른 이론가에 비해 모든 후세 이론가들의 열렬한 지지를 받은 것은 아니지만 그의 이론이나 음악은 11세기의 요한네스 아플리게멘시스(Johannes Affligemensis) 14세기의 요한네스 데 무리스(Johannes de Muris) 15세기의 아다무스 데 풀다(Adamus de Fulda) 16세기의 글라레아누스 헨리쿠스(Glareanus Henricus), 핀크 헤르만(Finck Hermann)등에 의해 끊임없이 인용되어 음악사속의 살아있는 모습을 볼 수 있으며 그의 글들을 통해 당시의 음악 세계를  경험할 수 있고 그의 깊은 신앙과 사색을 통해 전해지는 글들은 사뭇 감동적이기도 하다.

헤르만은 43년의 짧은 인생 속에서도 많은 자연과학적 연구와 문학작품, 뿐만 아니라 찬송가 예식가등을 작곡하고 신체적 장애에도 불구하고 악기나 시계 등을 제작하였다 한다. 특히 그의 시계 제작은 유명하여 몇몇 역사가들이 그의 직업을 "시계제작가"라고 잘못 전하기도 했다. 

Hermannus Contractus의 애제자였던 Berthold(1088년 사망)가 쓴 "Vita seu Elogium" {Monumenta Germaniae Historica 1826ff}은 우리가 현재 헤르만의 작품, 인간성, 인품을 가장 잘 엿볼 수 있는 문헌이기에 여기 전문을 번역하여 싣는다. (문체가 부드럽지 못한 것은 원문에 충실하려는 역자의 노력 때문(?)이라고 받아 주시기 바랍니다)

"신앙심이 깊은 귀인 감독관 Wolferadus의 아들 헤르만은 어렸을 때부터 온 지체가 마비되었다. 그러나 그의 정신은 그 세기의 모든 사람을 뛰어넘는 놀라운 재질을 타고났다. 모든 일반 예술과 측정의 기술을 그는 거의 혼자 터득하였다. 그는 어렸을 때부터 틈만 나면 공부에 열중하여 세속적이건 종교적이건 모든 학문을 터득하여 많은 사람들이 그에게 찾아와 (그의 재능을) 놀라워하고 부러워하였다.

그의 지체는 아주 심하게 마비되어서 한 번 자리에서 옮기려면 다른 사람의 도움이 없이는 불가능하였다. 몸을 돌리는 것조차 불가능했다. 이동용의 의자에 잠시도 가만히 있는 적이 없이 무슨 일인가를 하려고 했고 그 입, 입술과 혀가 마비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제자들에게는 열성에 찬 능변의 선생이었다.  그는 생기 있는 능변가로서 빈틈없는 토론가 이었고 항상 질문에 대답할 태세를 갖추었다.  그는 비틀어진 손가락으로 무엇을 쓰고 있든, 모든 정신을 집중하여 무엇인가 이로운 혹은 필요한 일을 하든, 남에게 무엇을 읽어 주든 항상 한 인간으로서 나무랄 데 없고 덕행의 모범이 되려 했다. 그는 항상 겸손한 사랑과 사랑스러운 겸손의 인물이었고 놀라울 정도의 인내심을 소유하고 모든 일에 따르려고 하며 순결하고 처녀와 같이 흠이 없음을 좋아하고 동정심을 유쾌하게 받아들이며 순전한 가톨릭신앙을 지키는 불굴의 신봉자이고 진실을 수호하며 크리스트교의 가장 경험이 많은 교사로서 한마디로 위대한 절제 자요 고지식한 금욕주의자 이었다(그는 어린 시절부터 고기를 먹지 않았다).  그는 시편을 외우든 기도를 하든 찬양을 하든 항상 명상적이었는데 이는 그가 Reichenau의 성스럽고 지혜로운 수도원장 Bern의 권고로 30년간 수도승 생활을 하기 이전부터 그러했다. 그는 그 모든 성스러운 경건 생활을 따랐다. 모든 이들이 그의 놀라운 호의와 붙임성 유쾌함과 모든 것을 견디어 내는 박애주의로 인해 존경했다. 모든 이에게 상냥하고 친절하며 어떤 일이든지 불공평하든 부정스럽든 나쁜 것이든 하나님의 의지에 반하는 것이면 그는 대항해서 일생을 통臼?싸웠다. 

 Hermann의 학문적 활동

시간 계산의 법칙과 논증에 있어서 그는 모든 선행자를 앞지르고 바른 규범을 세웠다. 그뿐만 아니라 월력의 계산에 있어 이제까지의 모든 경험에 비추어 보아도 가장 맞는 것을 보여 주었는데 밤과 낮의 어느 시간에 달이 해로부터 반사되는가 등을 계산하였고 월식의 계산에 있어서도 가장 지식이 풍부한 규칙을 세웠다. 기하학에서도 그는 이전의 모든 전문가를 그 지식이나 예리한 점에 있어 뛰어넘고 숫자와 도형을 간단한 규칙으로 정돈했다. 그는 시를 쓰고 작곡을 했는데 다른 어떤 사람보다도 음악에 정통하여 성 그레고르, 성 고르디안과 에피마쿠스, 성 아프라, 성 고해자 마그누스, 주교 성 볼프강 등의 가사에 온전한 역사적 성가(Officien)를 작곡했다. 그의 성가는 듣기 좋고 우아하다. 예수의 탄생부터 자신의 시대에 이르는 세계 역사에 관한 그의 저서는 정성스러운 열성으로 많은 원전에서 모은 것이다. 그는 또 황제 콘라드 2세와 하인리히 3세의 활동을 가장 아름답게 서술하였다. 그 외에도 여덟 가지 중요 고뇌에 대해 아주 시적으로 교체되는 운문을 사용하여 작고 즐거운 책을 썼다. 시계와 악기의 제조에 있어서는 다른 어떤 이들과도 비교할 수 없었다. 이 모든 것들 또 모든 다른 것들에 대하여 본인이 짧은 글 속에 언급하지 않지만 그는 그의 병이 허락하는 한 쉬지 않고 일하였다.

                                      *

하나님의 은총으로 그의 경건한 영혼이 이 감옥 같은 세상에서 마침내 해방될 즈음에 갈비 근처의 병이(pleuritica passio) 그를 엄습했다.  이 병으로 인한 열흘간의 끊임없는 끔찍한 고통으로 그는 쇠약해져 갔다.  그와의 특별한 우정을 맺고 있던 나는 어느 아침 예배가 끝난 이른 새벽에 그의 병상을 찾아가 좀 좋아졌는가를 물을 때 그는 대답하기를 

"나에 대해서 묻지 말고 내가 신뢰하는 자네에게 하는 내 말을 이제부터 잘 듣게, 의심 할 것 없이 나는 머지 않아 죽을 걸세, 나는 더 이상 살지 못할 걸세, 다시는 회복하지 못할 거야. 그래서 자네와 나의 모든 아는 분들에게 이 죄 많은 영혼을 맡기네. 나는 지난 밤 내내 어떤 황홀경에 빠져 있었네. 나는 마치 내가 Tullius Cicero의 Hortensius를 말짱한 정신으로 그것도 여러 번씩 읽고 있다고 생각했네, 마치 우리가 주님의 기도를 읽듯이 말이야. 아직도 읽던 것이 생생하네. 그리고 내가 받아 적게 하려던 [고뇌의 원초 de vitiis]도 마치 그 작품을 이미 끝내기라도 한 듯이 읽었네. 이 독서가 나로 하여금 이 세상의 것들과 그에 속한 것들을 혐오하고 메스껍게 만들었네, 한편으로는 앞으로 올 영원한 삶을 기대하며 모든 없어질 것들을 텅 빈 아무것도 아닌 무(無)로 여기게 했네. 나는 이제 삶에 지쳤네."

그의 이상(理想)과 말에 적지 아니 놀란 나는, 위대한 친구이며 선생과의 이별이 항상 그렇듯이, 울음을 터뜨리며 슬퍼하며 갈피를 잡지 못했다. 그러나 그는 엄격하며 떨리는 눈초리로 나를 나무랐다. "자네 나를 위해 울지 말게, 오히려 찬양하며 나를 축하해 주게 이것을 받게 자네에게 부탁하네 내 원고를! 남은 부분을 열심히 써 주게 그래서 그 글의 가치를 인정 할 줄 아는 이에게  계속 전해 주게. 자네는 자네 일생을 통해 자네도 언젠가는 죽어야 함을 매일 생각하게. 내 사랑하는 친구여 그리고 모든 노력을 기울여 그 어느 날 어느 시간이 될지 모르는 순간을 준비하게." 이말 후에 그는 조용하였다. 이 날 이후 그는 아! 마지막까지 허약해져 갔다. 그는 참된 고해성사가 끝난 후에 조용히 명상 속에 주의 주검을 받아들였다. 9월 24일 (1054) 많은 친우들의 울음과 기도 속에 그가 그렇게 고대하던 복된 마지막을 맞았다. 모든 이들에게 슬픔을 안겨 주고 그는 그의 선조성(先祖城) Alleshusan에 화려한 장례 식후 평화 속에서  잠들었다."

헤르만이 우리에게 남긴 많은 저서 중 특히 음악 이론을 다룬 것은 4권이 있다. 그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저서로는 Musica를 꼽을 수 있다. 현존하는 필사본은 Rochester 의 Sibley 박물관의 것과 Brambach, Ellinwood 등의 것이 있다. Musica에서 헤르만은 각 음의 이름, 테트라코드에 의한 선법과 각 선법의 종지법, 4도 5도의 현 길이에 의한 구분 등을 설명하고 있다. 

헤르만의 당시 명성은 대단해서 11세기에 벌써 그에 관한 전설이 유럽 전역에 퍼져 있었다. Annales Augustini는 그를 "우리 세기의 기적"이라고 표현했으며 그의 Musica에 대해서 Wilhelm Brambach는 "이 영역{음악}에 있어서 중세의 가장 간단명료하고 가장 훌륭하며 가장 정교한 작품"이라고 호평하였다. 그가 우리에게 남긴 유산 중에는 음악 이론서 뿐이 아니라 각종 성가곡, 수학 참고서, 기하학, 천문학 등에 관한 저술이 있으며 그 외에도 여덟 가지 주요 고뇌에 관한 밝은 시(詩)가 남아 있다.

장우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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