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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메타나, 베드르지흐 [Smetana, Bedric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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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한국음악연구소
등록일자 : 초기자료

스메타나, 베드르지흐 [Smetana, Bedric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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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메타나


체코의 작곡가. 어릴 때부터 음악에 재능을 보여 6세 때부터 공개적인 피아노 연주를 했다. 여러 선생들에게 피아노를 배웠으며, 청소년 시절에 벌써 작곡하기 시작했다. 1843년 이후에는 음악에 전념하였다. 1847년부터는 프록쉬(Josef Proksch) 교수에게 피아노와 음악이론을 공부했다. 프라하에서 그는 베를리오즈, 슈만과 그 부인 클라라를 개인적으로 만날 수 있었다. 1847년 5월 이후 체코 각지에서 연주했다. 1848년 그는 3월 혁명에 참여하였다. 이는 체코 민족의 존엄성을 오스트리아로부터 쟁취하자는 것이었다. 그는 혁명적 노래와 행진곡들을 작곡하였다. 그리고 최초의 관현악 작품인 {경축서곡}(1848/49)을 작곡하였다. 혁명은 실패로 돌아갔다. 그는 경제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어려운 시기를 보냈다. 정치적 상황은 자유스러운 의견을 억제하였고, 예술적 활동은 얼어붙었다. 1848년 그는 이름만 알고 있었던 리스트에게 편지를 보내어 경제적 지원과 자신의 작품({6개의 성격소곡}Six morceaux caractéristiques, op.1)을 출판할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하였다. 리스트는 그를 경제적으로 돕지를 않았으나, 그의 작품들(op.1과 {Albumblätter} op.2)이 출판되는 길을 터 주었다(1851). 그는 이 일을 통해서 리스트와 지속적으로 사귈 수 있게 되었다. 

1848-56년 스메타나는 음악학교를 프라하에서 운영하였다. 1849년 그는 결혼했다(부인: Katerina Kolárová). 이 시기 실내악 연주에 자주 참여하였다.{승리의 심포니} 완성(1854). 1855년 음악적 재능이 출중했던 딸(Bedriska)의 죽음을 슬퍼하며 피아노 삼중주 g단조를 작곡하였다. 

스메타나는 1856년 스웨덴의 괴테보르그(Göteborg)로 가서 그 곳에서 지휘자로 일했다. 그는 모차르트, 멘델스존, 슈만, 리스트, 바그너의 작품을 많이 연주했다. 스웨덴에서 지휘자로, 피아니스트로, 음악교수로 명성을 쌓아갔다. 이 시기의 그는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었으나, 부인의 죽음(1859)으로 심적으로 어려워졌다. 1859년 그는 독일을 여행하면서 바이마르에서 리스트를 만났다. 페르디난디(Bettina Ferdinandi, 1840-1908)와 결혼하였다(1860). 스웨덴에서 그는 음악도 가르치고, 작곡도 했다(교향시: {리차드3세}, op.11, 1858. {발렌슈타인의 진지}, op.14, 1858, {하콘 얄}, op.16, 1860). 그의 교향시들은 리스트의 음악을 모델로 한 것들이었다. 그는 리스트 추종자라고 불릴 만했다. 

오스트리아가 나폴레옹 3세에 패하여 체코의 강압적 정치체제가 어느 정도 풀리면서 스메타나는 프라하로 되돌아왔다(1861). 1862년 국립오페라 극장으로 가는 임시적인 극장체제하에서 그는 일했다.  1866-74년에는 국립극장에서 지휘자로 일했다. 1866년 이 극장을 위한 자신의 최초 오페라 {보헤미아의 브란덴부르크 사람}(Branibori v Cechách)을 작곡했다. 그 다음의 작품은 {팔려간 신부}(Prodaná nevesta, 1866/1869)였다. 이 작품은 손쉽게 접근할 수 있는 선율과 가벼운 폴카 리듬으로 사람들을 열광하게 했다. 이 작품은 아직까지도 그의 가장 대중적인 작품으로 남아 있다.   

1868년에는 비극적 오페라 {달리보}(Dalibor)를 작곡했다. 이 작품에는 바그너 음악으로부터 받은 영향의 흔적을 뚜렷하게 지니고 있다. 바그너적인 라이트모티브나 끊임없이 이어지는 무한선율적인 오페라의 진행이 바로 그런 것들이었다. 이 때문에 민속음악을 통한 민족주의적 음악의 형성을 원했던 사람들로부터 그는 민족적이지 못한 작곡가라는 비난을 받았다. 이 작품은 그의 사후에 비극을 매우 깊이 형상화한 작품으로 평가를 받게된다. 하지만 당시 스메타나는 이 오페라 때문에 반민족적인 작곡가라는 비난을 들었고, 그 후로 그는 비극 오페라를 작곡하지 않았다.       

이 오페라가 공연되기 조금 전에 스메타나는 극장 안에 오페라 학교를 설립했는데, 이것이 친구였던 성악가 피보다(F. Pivoda, 1824-1898)는 못마땅하게 생각했다. 그 친구는 성악학교를 운영하고 있어서 오페라학교의 설립을 반대했고, 반대가 무산되자 스메타나의 가장 강력한 반대자가 되었다. 이 때에 오페라 {달리보}가 공연되었다. 이 오페라 역시 반민족적이라는 비판되면서 스메타나는 크게 무너져 내렸다. 그의 민족주의적 다음 오페라 {리붓셰}(Libuše)가 1872년 공연될 예정이었으나, 비판자들이 악평하는 바람에 공연되지 못하고 말았다. 그는 곧 {두 미망인}(Dvê vdovy)이라는 희극 오페라를 작곡하였다(초연: 1874). 이 작품에 대해서도 비판자들은 엉뚱하게도 바그너적이라는 비난을 퍼부었다. 스메타나는 신문 등을 통해 자신의 음악적 입장을 방어하는 입장에 서게 되었다. 다른 한편으로 그를 옹호하는 그를 옹호하는 평론가 그룹이 나타나기도 했다(Ludevít Procházka, Otakar Hostinský 등). 오페라 극장의 직원들도 그를 옹호했다. 하지만 그 와중에 그는 건강을 잃고 말았다. 그는 1874년 귀가 먹었고, 그 후 음악활동이 쉽지 않았다. 1882년 이후의 스메타나의 작품에는 정신병적인 흔적이 남아 있다. 이 병에 의해 그는 1884년 죽었다. 

그는 병마와 사우면서도 음악창작을 포기하지 않았다. 그는 그 때까지 주로 오페라 작곡가였고, 어쩌다가 작은 작품들을 썼다. 그는 병상에서 여러 개의 교향적 작품들을 구상했다. 이 구상은 그의 오페라 {리붓셰}의 마지막 장면과 관계가 있는 것들이다. 그는 애초에 교향시 삼부작을 의도하고 시작했으나 결과는 다르게 나왔다. 첫 부분은 {비셰라트}(Vyšehrad )와 {몰다우}(Vltava “블타바”)였는데, 이 작품들은 절망적인 건강상태에 빠지는 1874년에 작곡되었다. 그 다음 해에 {샤르카}(Sárka)와 {체코의 숲과 초원에서}(Z českých luhụ a hájụ)가, 그리고 1878/79년 겨울에 마지막 작품인 {타보르}(Tábor)와 블라니크(Blaník)가 작곡되었다. 이로서 전작이 완성되었다. 이 전작의 이름을 그는 {나의 조국{(Má vlast)이라 이름했다. 이로써 그는 조국 체코에 음악적 기념비를 만들어 주었다. 

그 외에도 스메타나는 자서전적 현악사중주인 {나의 생애에서}(Z mého života 1876), {체코 춤곡}(České tance, (1877과 1879), 칸타타{체코의 노래}(Česká píseň, 개정:1878)와 같은 작품들을 남겼다. 

그의 교향시와 초기 오페라들은 체코의 민속음악, 리스트적인 오케스트라의 표현, 바그너적인 극음악을 결합시킨 성격의 것이다. 그를 음악적으로 평가할 때에 중요한 위치를 점하는 것은 오페라 {달리보}, 두 개의 현악사중주, 귀가 먹은 후에 작곡한 두 개의 서정적 오페라이다. 스메타나는 자신의 작품에 민속음악을 자신의 큰 작품 속에 그대로 사용하거나 모방한 일은 없이 체코적인 성격을 드러내느데 성공한 작곡가였다. 그는 체코 음악을 상당한 수준으로 끌어올린 작곡가임에는 틀림없고, 사람들은 가끔 그를 체코 민족주의적 음악의 기초자라 불릴 정도로 체코의 음악에서는 중요한 인물이다. 뿐만 아니라, 그의 작품들은 세계 여러 나라에서 자주 연주되는 레퍼토리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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