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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르골레지 [Pergolesi, Giovanni Battist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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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르골레지(Giovanni Battista [Giambattista] Pergolesi, 1710.1.4.Ancona - 1736.3.17 Napol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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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폴리의 오페라 작곡가. 1723-31년 나폴리의 음악원(Conservatorio dei Poveri di Gesù Cristo)에서 공부했다. 그는 이 학교에서 1725년에는 소년소프라노로, 1729/30년에는 제1바이올리니스트와 보조교사로 일했다. 이 시기에 그가 만든 솔페지오들이 남아 전해온다. 
1731년 그는 오페라 세리아 ≪살루스티아≫(Salustia)를 공연했고, 1732년 나폴리의 스틸리아노(Stigliano) 왕자의 카펠마이스터가 되었으며, 같은 해에 나폴리 사투리로 된 ≪사랑에 빠진 남매≫(Lo frate’nnamorato, 대본: Gennaro Antonio Federico)를 무대에 올렸다. 
1733년 8월 28일 나폴리는 엘리자벳타 크리스타나(Elisabetta Cristina) 황녀의 생일을 기념하는 경축일이었다. 나폴리에서 가장 큰 극장이었던 산 바르토로메오(Teatro al S. Bartolomeo)에서는 23세의 작곡가 페르골레지의 세 번째 오페라 세리아 ≪거만한 죄수≫(Il prigioniero superbo, 대본: Gennarantonio Federico )가 무대에 올려졌다. 이 오페라는 3막이었는데, 그 막 사이사이에 두 개의 막을 가진 한 막간극(Intermezzo 또는 Intermedio)을 집어 넣었다. 비극과 희극의 두 개 오페라를 혼합공연하는 것은 당시 나폴리에서 관습적인 것이었다. 중심 오페라였던 ≪거만한 죄수≫가 별로 성공하지 못한 반면에, 막간극 ≪하녀 마나님≫(La serva padrona)은 당대에 큰 성공을 거두었다. 이 막간극 덕분에 페르골레지는 음악사에서 빠질 수 없는 인물이 되었다. 이것은 프랑스의 오페라 코미크를 위한 모델이 되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그러한 명성을 스스로 누리기 전에 세상을 떠났다(그가 죽은지 10년 되던 해인 1746년에 막간극 ≪하녀 마나님≫은 빠리에서 공연되었고, 1752년에 2차로 공연되었는데, 이때 빠리 사회를 떠들썩하게 만든 부퐁논쟁이 일어났다). 
페르골레지가 나폴리를 위해 마지막으로 1734년 무대에 올린 오페라 세리아는≪시리아의 아드리아노≫(Adriano in Siria)였는데, 막간극 ≪리비엣타와 트라콜로≫(Livietta e Tracollo)도 함께 공연되었다. 1734년 페르골레지는 로마의 맏달라니(Maddalani) 공작에게서 일했으며, 5성부 F장조 미사를 공연했다. 거기서 그는 1735년 오페라 올림피아데≪L’Olimpiade≫를 공연했다. 이 해에 여기서 마지막 작품 ≪스타바트 마테르≫를 작곡했다. 페르골레지는 어렸을 때부터 병약하였고, 26세로 나폴리 근교 포쭈올리(Pozzuoli)의 한 수도원에서 죽었다. 

음악을 전문으로 하지 않는 일반인들도 페르골레지의 이름을 접할 기회를 주는 곡이 있다. 그것은 ≪니나≫(Nina)라는 제목의 비교적 짧은, 감상성이 강한 성악곡이다. 19세기 이래 수많은 테너 가수들에 의해 불려 일종의 세계적 애창곡이 된 노래이다. 세상을 떠난 니나의 침상 앞에서 그의 연인이 “일어나라”고 탄식하는 내용이 자연스러운 단조의 흐름을 따라 서글픔을 불러일으키는 노래이다. 중간중간 가사없이 장식적으로, 또는 음계음을 벗어나며 성악적으로 기량을 발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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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제는 이 노래가 페르골레지의 작품이라는 증거가 없다. 이 곡은 치암피(Legrenzio Ciampi, 1719-1762), 파이제엘로(Giovanni Paisiello), 카푸아(Rinaldo di Capua, 1705- 1780년경)의 작품으로 추정되는 경향이 있는데, 이렇게 다수의 사람이 원작자로 보이는 이유는 이 사람들의 오페라에 모두  ≪니나≫ 노래가 등장하기 때문이다.  그 중 원작자에 가장 가까운 사람은 치암피로 보인다.  그의 오페라 부파 ≪우스꽝스러운 멋쟁이 세 사람≫(I tre cicisbei ridicoli, 1749)에 이 노래가 가장 상황에 잘 맞게 자리잡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나폴리 식이 아니라 베니스 식의 곡을 썼고, 결정적 문헌의 확인을 받을 수 없다는 점에서 원작자라 말하기 어렵게 하는 측면도 있다(http://de.wikipedia.org).    
  이렇게 페르골레지의 것으로 알려진 작품들은, 그것도 굉장히 많은 수가 실제로 그의 것이 아니다. 이런 현상은 그의 높은 명성과 관련이 있다. 그의 명성은 그의 사후에 나타난 것이다. 그는 불과 26년 동안 세상에 살았다. 그는 죽을 당시 가장 유명한 나폴리 작곡가였다. 그의 음악은 후기 바로크를 벗어나서 호모포니적, 감정과다적 음악으로 이행하는 선두 주자였을 뿐만 아니라, 새로운 음악을 위한 모델적 역할을 하였다. 그는 후대의 사람들에 의해 전설이 되었고, 이 점이 그의 이름을 표기한 많은 가짜 작품들이 만들어지는 여건이 되었다. 그러한 전설에 스트라빈스키는 자신도 모르게 속고 말았다. 그는 많은 그 가짜 작품들을 진짜로 알고 자신의 발레≪풀치넬라≫(Pulcinella)에 사용하였다. 스트라빈스키가 사용한 작품들은 단지 몇 곡만이 진짜 페르골레지의 것이었고, 대부분은 갈로(Domenico Gallo), 켈레리(Fortunato Chelleri), 여타 무명 작곡가들의 것이었다. 
  그의 명성은 두 가지 방향으로 이루어졌다. 하나는 오페라 ≪하녀 마나님≫으로 인해 얻은 대중성과 국제적 명성 때문이다. 다른 하나는 특히 이태리인들에게 널리 사랑받은 ≪스타바트 마테르≫를 통해 얻은 명성 때문이다. 첫 원인은 매우 유쾌한 음악 때문이고, 두 번째는 매우 슬픈 음악 때문이다. 그 두 곡이 아니더라도 그의 음악은 슬픔과 기쁨의 양극을 왔다갔다한다. 그의 음악은 바로크 시기의 것이기는 하나 매우 단순화된, 거의 고전시대의 음악에 근접한, 청중들에게 접근이 쉬운 음악이었다. 이런 모습은 대위법적 음악에서도 그러하다.
 페르골레지의 유쾌한 음악은 매우 단순한 구조로 되어 있다. 이는 흔히 작은 노래의 형식을 통해 도달 된다. 아래의 예는 ≪하녀 마나님≫ 중의 여주인공 세르피나의 노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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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도 반복되고, 말도 반복되는데, 음악과 말이 같이 간다. 즉 같은 음악이 같은 말과 함께 간다. 말의 구문은 짧고, 프레이즈 역시 짧다. “No” \"Zit\"와 같은 짧은 말들이 중간중간 섞이며 반주가 그 사이를 메운다. “-o”로 끝나는 단어로 꽉 차 있다. 이러한 말장난은 말과 음악에 희극적인 면을 증대시킨다.  음악의 빠르기로 우스꽝스러운 효과를 가져오는 아리아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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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르피나 때문에 혼란에 빠진 우베르토가 부르는 아리아이다. 빈박을 짚고 나오는 전주의 모티브는 경쾌하게 울린다. 이 첫머리는 3마디 동안 매 마디에서 반복하는데, 노래의 첫 선율을 그대로 따온 것이다. 노래에 붙은 가사는 “아 혼란스러워”(Son imbrogliato io gia)라는 말이다. 이는 어쩔 줄 몰라 하는 사람이 빠르게 부르는 노래이다. 오페라 부파의 주역에게는 이런 빠른 말 노래가 주어진다. 따라서 첫 모티브가 기악으로 연주될지라도 익살스러운 면이 포함되어 있다. 즉 피치카토와 넓은 도약이 그것인데, 이는 나중 기악곡에서 스케르쪼의 특징이 되는 것이다. 

 1732년 페르골레지는 오페라 ≪사랑에 빠진 남매≫ (Lo frate’nnamorato, 1732)로 큰 성공을 거두었다.  이 작품은 ≪사랑에 빠진 수도사≫(“The Friar in Love”)이라고 이름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 작품은 수도사와 아무런 상관이 없다. “수도사”로 잘못 번역된 frate는 이 오페라의 내용에서, 그 뜻이 영어의 brother에 해당한다. 그러니까 제목은 ≪사랑에 빠진 형제≫(“The Brother in Love”) 정도일 것이다. 하지만 모르고 사랑한 대상이 혈연적 관계의 누이이기 때문에 우리말로는 “형제” 대신에 “남매”라는 의역이 더 낫다. 이 오페라의 주인공 아스카니오(Ascanio)는 네나(Nena)와 니나(Nina)를 동시에 사랑하며, 어느 쪽을 택해야할지 정신을 못 차린다. 두 처녀는 언니와 동생 사이이다. 그런데 이 처녀들을 사랑하는 청년 아스카니오는 옛날 실종된 그녀들의 친오빠이다. 이 오빠의 몸에 있는 점이 우연히 발견되며, 그들의 혈연관계가 밝혀진다. 사랑의 방황은 끝난다. 오빠는 처음부터 자신을 사랑했던 루그레치아(Lugrezia)와 결혼한다. 오페라는 이런 결과가 있기까지 엎치락뒤치락하는 내용으로 되어 있다. 어느 나라의 극에서나 있는 이른바 “혈연의 비밀”이 줄거리를 이끄는 동력이 된다. 즉흥적인 요소가 많은 코메디아 델 아르테(Commedia dell’arte) 방식의 극진행을 통해 중간중간의 상황적 연기를 통해 웃을 수 있는 기회를 많이 제공한다. 따라서 악보나 대본 밖의 연출이 중요하다. 대본은 나폴리 사투리로 쓰였고,  노래는 단순한 장절적 칸쪼나(canzona)를 사용한다. 춤곡의 요소도 상당히 많다. 예를 들어 돈 피에트로가 부르는 사랑에 빛나는 고운 눈동자여’는 과장되고 부자연스러운 미뉴에트이다(이 음악은 스트라빈스키의 발레 풀치넬라(Pulcinella)에서도 사용된다). 또한 오페라 세리아의 아리아를 희화화하여 부르는 노래도 있다. 예를 들어 네나가 부르는 아리아 “사랑의 바다를 헤치며 나아가라”(Va solcando il mar d’amore)는 콘체르토 악기(플루트)를 동반하며, 오페라 세리아의 아리아를 흉내 낸다. 탄식적인 외침, 쉼표로 끊어지는 한숨의 모티브, 감상적 선율선이 그런 것들이다. 여기에 우스꽝스러운(buffo)적인 움직임을 가진 선율과 반주가 혼합된다.  1막 피날레의 2중창과 2막 피날레의 4중창은 짧으나 우스꽝스러운 선율로 마감하는 전통을 따른다. 이 곡의 서곡은 이미 고전적 단순함과 유쾌함이 넘쳐난다.       

≪스타바트 마테르≫는 18세기 중엽 이후 전 유럽에 걸쳐 널리 가장 많이 공연된 교회음악 중 하나였다. 전혀 다른 성격의 교회음악을 작곡했던 바흐조차도 이 곡을 독일어본으로 연주했을 정도였다. 이 곡은 그 유명함이 더함에 따라 이 곡과 연관된 전설적 이야기들이 많이 만들어졌다. 이 곡이 언제 어떤 환경에서 작곡되었는지 잘 몰랐기에 그런 이야기들은 쉽게 증가했다. 이 곡은 대단히 적은 수의 편성을 보여준다. 성악은 소프라노와 알토의 두 성부로만 되어 있고, 그것을 현악기들이 반주한다. 이는 알레싼드로 스카를랏티의 ≪스타바트 마테르≫와 동일한 편성이다. 페르골레지가 이 곡을 생의 말년에 쓴 것은 확실하지만, 그 이전에 썼던 곡들을 많이 활용했다. 레치타티보를 전혀 사용하지 않은 이 곡은 주로 2부분 형식의 교회 아리아(Aria da chiesa)를 사용했다. 전12곡 중 절반이 두 성악독창자를 위한 이중창으로, 나머지는 모두 독창자를 위한 아리아이다. 음악은 교회음악의 전통을 따르기 보다는 세속음악의, 특히 오페라 음악의  형식과 분위기를 더 많이 취했다. 이 때문에 전통적 교회음악을 강하게 옹호한 사람들로부터 많은 비난을 받기도 했다. 교회음악 전통의 모방양식은 간결하고 느슨하게 나타난다(예: 첫 곡인 아래의 악보, 또는 8번곡, 2번 곡). 기악성부들에서는 3도나 6도로 선율과 함께 흐르는 경향이 압도한다. 성악 선율에는 나폴리 오페라의 달콤함과 부드러움이 스며있는데(예: Quae moerebat, Sancta Maria), 이는 이 작품이 대중적일 수 있게 하는 중요한 요건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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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2도로 시작하는 긴 선율선이  제2바이올린에 의해 여리게 울리면, 그것을 제2바이올린이 모방적으로 받는다. 비올라는 바이올린과 유사한 긴 리듬을 가졌으나 모방이 아닌, 독자적 선율를 갖는다. 세 상성부는 당시 트리오소나타 음악에서 보는 전형성을 갖고 있다. 거기에 첼로가 같은 리듬을 연속적으로 울리는 이른바 “걷는 베이스”로 단조 조성의 윤곽을 그리며 긴 음표의 상성부와 대조를 이룬다. 마디l6에 이르면 소리는 커지고 높은 음을 울리다가 그 다음 마디에서 갑자기 소리가 옥타브 아래로 꺼진다.  그리고 여린 소리로 “한숨의 모티브”를 하성부들과 상성부들이 그룹을 이루어 8분음표의 시차를 두고 이어진다. 이런 측면이 그가 오페라 작곡가라는 것을 기억하게 한다. 모방양식적 교회음악 안에서도 극적 성향이 살아있다. 


참고문헌:

Leopold, Silke/Scheideler, Ulrich. Ortorienführer, Metzler(Stuttgart), 2000. 
Henze-Döhrng, Sabine. Pergolesi, Komponisten-Lexikon(Horst Weber), Metzler Stuttgart, 2003.
Schläder, Jürgen. Pergolesi: La serva padrona, Pipers Enzyklopädie des Musiktheaters vol.4, München, 1991.   
http://de.wikipedia.org/wiki/Tre_giorni_son_che_Nina

 

등록일자: 2005-02-14
홍정수
 

작곡(가)사전 한독음악학회

페르골레지, 조반니 바티스타(Pergolesi, Giovanni Battista, 1710-1736)

- 1710년 1월 4일 안코나(Ancina) 지역의 이에시(Iesi)에서 출생.
- 이에시에서 산티(F. Santi)로부터 기초 음악공부를, 그리고 몬디니(F. Mondini)에게서 바이올린을 배움.
- 1722년경 나폴리의 음악학교(Conservatirio dei Poveri di Gesù Cristo)에 입학함.
- 그레코(G. Greco)와 두란테(F. Durante)에게서 작곡을, 페라로(G. Ferraro)에게서 성악을, 인판테스(B. Infantes)와 그의 후계자인 데 마테이스(D. de Matteis)에게서 현악기를 배움.
- 졸업작품 ≪성 굴리엘모≫(San Guglielmo)가 성 아넬로 마지오레(San Agnello Maggiore) 수도원에서 상연됨.
- 1732년 ≪살루스티아≫(Salustia)를 초연함. 
- 1732년 나폴리 총독인 스틸리아노(F. C. Stigliano) 왕자의 음악감독이 됨.
- 1732년 ≪사랑에 빠진 남매≫(Lo frate’nnamorato)가 대성공을 거둠.
- 1733년 황후의 생일(8월 28일)을 축하하는 작품 ≪거만한 죄수≫(Il prigioniere      superbo)의 막간에 이루어진 ≪마님이 된 하녀≫(La serva padrona)가 인기를 얻음.
- 1734년 부르봉의 샤를 III(Charles Bourbon)가 스페인 군대와 함께 입성하면서 페르골레지는 스틸리아노 왕자를 따라 로마로 감.
- 1734년 ≪시리아의 아드리아노≫(Adriano in Siria)의 막간극 ≪리비에타와 트라콜로≫  (Livietta e Tracollo)가 엄청난 인기를 끌게 됨.
- 1735년 ≪올림피아데≫(L′Olimpiade)를 작곡함.
- 1735년 ≪플라미니오≫(IL Flaminio)를 작곡함. 
- 1735년 나폴리 근처 포추올리(Pozzuoli)에서 휴양 중 ≪슬픔의 성모≫(Stabat Mater)를 작곡함.
- 1736년 3월 16일 폐결핵으로 사망.

  이탈리아 작곡가인 페르골레지가 오페라 작곡가로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한 것은 나폴리의 음악원(Conservatirio dei Poveri di Gesù Cristo)의 졸업 작품을 통해서이다. 졸업생들은 3막의 종교적인 오페라 작곡을 써야 했고, 그 작품들은 심사를 거쳐 공개 연주되었다. 그의 졸업 작품 ≪성 굴리엘모≫(San Guglielmo)(원제목: Li prodigi della divina grazia nella conversione di S. Guglielmo Duca d’Aquitania)도 그런 기회로 무대에 올려졌다. 그는 졸업과 더불어 성 바르톨로메오 극장(Teatro San Bartolomeo)에서 연주될 카니발 공연개최를 위한 오페라 세리아를 작곡해 줄 것을 의뢰 받아 ≪살루스티아≫(Salustia)를 1732년 초 초연하게 된다. 이 작품을 위한 전반적인 작업환경은 좋지 않았다. 특히 가장 비중 있는 가수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다른 가수가 급하게 대신하게 되면서 수정 부분들이 생겨나는 등, 공연이 미뤄지던 이 작품은 당시 그리 성공을 거두지 못하였다. 
  1732년 페르골레지가 나폴리 총독인 스틸리아노 왕자의 음악감독이 된 후 작곡한 오페라 ≪사랑에 빠진 남매≫(Lo frate’nnamorato, 1732)는 주목할 만한 대성공을 거두게 된다. 이 작품은 독자적인 희가극(comedie musicali) 형태의 초기 유형으로서, 나폴리의 방언 및 그 지방의 민속 음악적 요소, 세리아 아리아와 부파적 부분들이 어우러져 있다. 이 작품에서 페르골레지는 희극 오페라 작곡가로서의 역량을 최초로 보여주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1733년 페르골레지는 황후의 생일(8월 28일)을 축하하는 의미에서 오페라를 작곡할 것을 위임받게 되는데, 이 때 쓴 작품이 ≪거만한 죄수≫(Il prigioniere superbo, 1733)이다. 이 오페라 세리아는 남자 주인공이 없고 여자 주인공도 소프라노가 아닌 알토이고, 적은 배역을 갖는 특이한 것이다. 이 작품은 막간극(Intermezzo)이었는데, 주 프로그램인 오페라 세리아보다 더 큰 호응과 인기를 끌었다는 점에서 역사적으로 주목을 끈다. 
≪거만한 죄수≫의 막간극으로 무대에 올려 진 작품인 ≪하녀 마나님≫(La serva padrona)은 1752년 프랑스 파리에서의 재공연된 이후 촉발된 ‘부퐁논쟁’(querelle des bouffons)의 중심에 서있던 작품이다. 이 작품의 단순하고 자연스러우면서 해학적인 전개, 나폴리 지방언어의 독특한 리듬과 억양을 잘 살린 측면, 일상의 모습들이 생동감 있는 인물 및 상황 설정을 통해 제시되는 점들이 당시 루소를 중심으로 한 이태리 오페라 관심자들의 옹호를 받았다. 다른 한편으로 라모를 위시한, 프랑스 오페라의 전통 계승에 입각하여 이탈리아 오페라 부파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그런 견해에 반대하여 두 그룹 사이에 강한 논쟁이 일어났다.
  1734년 스페인 국왕의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쓰여진 오페라 ≪시리아의 아드리아노≫(Adriano in Siria) 또한 ≪거만한 죄수≫와 비슷한 반향을 청중으로부터 일으키게 되어, 한 시간도 안 되는 막간극인 ≪리비에타와 트라콜로≫(Livietta e Tracollo)가 엄청난 인기를 끌게 되면서, 이후 이 막간극은 ≪시리아의 아드리아노≫와 함께 공연되기보다 독자적으로 곧 유럽 주요 극장의 레퍼토리에 등장하게 된다. 당시 신분상승을 꿈꾸는 세태와 귀족에 대한 풍자, 해학적이고 인간적인 면모가 재치 있게 전개되는 구성은 페르골레지의 음악과 더불어 어느 사회 계층에게도 신선한 대안 그 자체였다.  
  1735년 로마의 토르디노나 극장(Teatro Tordinona)에서 초연된 오페라 ≪올림피아데≫(L’Olimpiade)는 텍스트를 다룸에 있어 부파적인 면모가 뚜렷하다. 이 작품은 이전의 화려한 선율선(virtuoso)이 아닌 내적인 표현력과 독특한 음향을 가지고 있다. 이런 점이 못마땅한 로마의 한 보수적인 청중이 그의 머리를 향해 오렌지를 던진 일화는 유명하다. 
  같은 해 나폴리의 피오렌티니 극장(Teatro dei Fiorentini)에서 상연된 희극 오페라 ≪플라미니오≫(IL Flaminio, 1735)는 대성공을 거두었는데, 특이하게도 배역들이 성악가가 아닌 코메디아 델라르테(commedia dell’arte)의 연기자들에 의해 이루어져 개개 인물의 다채로움이 살아있는 작품이다. 라이몬도 백작(Raimondo di Sangro)의 결혼식을 위한 작품 ≪행복한 시간≫(Il tempo felice)은 페르골레지의 건강이 악화됨으로 인해 중단되었고, 다른 작곡가(N. Savatino)에 의해 완성되었다. 그가 병세의 호전을 위해 나폴리 근처 포추올리(Pozzuoli)에서 휴양을 할 때 ≪슬픔의 성모≫(Stabat Mater)를 작곡했다. 페르골레지는 1736년 3월 16일 폐결핵으로 사망하였고 포추올리의 프란치스카 교회에 묻혔다. 천재이지만 너무나 짧은 생애를 살았다.
 그의 작품목록으로 제시되는 작품들은 과연 그의 것인지 확신할 수 없는 경우가 많다. 그 한 예로 스트라빈스키(I. Stravinsky)가 그의 발레음악인 ≪풀치넬라≫(Pulcinella)에 인용하였다고 알려진 1780년 런던에서 페르골레지 이름으로 출판된 ≪12개의 트리오소나타≫는 나중에 갈로(D. Gallo)라는 작곡가의 작품이라는 것이 판명되었다. 
  오페라 이외에도 페르골레지는 종교적 작품을 여럿 남겼는데, 그의 미사곡들에는 합창과 중창에서의 대위구조와 독창에서의 오페라 아리아적인 선율선이 보인다. 그의 마지막 작품인 ≪슬픔의 성모≫는 당시 18세기에 가장 많이 인쇄된 악곡이면서 수많은 편곡의 모델이 되기도 하였다. 그 대표적인 예로 J. S. 바흐는 「시편 51」의 가사를 가져와 페르골레지의 선율을 활용기도 하였다(≪주여, 저의 죄를 사하소서≫[Tilge, Höchster, meine Sünden, BWV 1083]).


참고문헌

최승현. “G. B. Pergolesi 재조명(再照明)”, 『音樂硏究』 제1집, Vol. 14, No.1, 1997, pp. 311-343.
Hucke, Helmut  / Monson, Dale E. “Pergolesi, Giovanni Battista.” The New Grove Dictionary of Music and Musicians, Stanley Sadie(편), London, 2001, Vol. 19, pp. 389-397.
Hucke, Helmut. “Pergolesi, Giovanni Battista.” Musik in Geschichte und             Gegenwart, F. Blume(편), 1949-1979, Bd. 10, S. 1048-1064.
Blume, Jürgen. “Sempre in contrasti: Heiterkeit und Empfindsamkeit bei Pergolesi.”  Neue Zeitschrift für Musik, Jg. 147, 1986, S. 17-19.


등록일자: 2010.1.4.
[김은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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