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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조(金熙祚)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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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택완

저자: 김택완

등록일자: 2010.7.22


김희조(金熙祚)


1920년 11월 21일 서울에서 출생(호: 春峰). - 1933년 동성상업학교(현 동성 중․고등학교)에 입학하면서 야마하 하모니카 합주단에 가입. 이 시학회 김희조(金熙祚, 1920-2001) - 1920년 11월 21일 서울에서 출생(호: 春峰). - 1933년 동성상업학교(현 동성 중․고등학교)에 입학하면서 야마하 하모니카 합주단에 가입. 이 시절 음악에 대한 꿈을 키워나감. - 1939년 동성상업학교를 졸업하고 한성은행(현 조흥은행)에 입사. 은행원 시절이었던 1944년까지 피아노(사사: 김홍조), 바이올린(사사: 안병소), 비올라(사사: 안성교)를 개인지도 받음. 또한 이 때 작곡에 대한 기본적인 학습도 이루어짐. 화성학과 대위법을 독학하였고 1945년까지 김순남에게 작곡을 배움. - 1945년 1월 조선호텔 실내악부에 피아노 연주자로 참여. 1945년 8월 7인조 경음악단을 조직하고 피아노 연주자로 활동함. - 1946년 고려교향악단에 입단하여 비올라와 콘트라베이스 연주자로 활동. 또한 12인조의 오케스트라를 조직해서 순회연주를 다님. - 대한민국 정부수립과 함께 1948년 육군 군악대 장교모집에 6기생으로 임관, 제 5여단의 군악대장으로 활동. 1957년 중령으로 예편할 때까지 많은 군가, 행진곡 등의 군악대 음악을 작곡. - 1957년 신흥대학교(현 경희대학교)에서 작곡이론과 관악합주를 지도. - 1958년부터 KBS 스몰오케스트라의 상임지휘자로 활동. 라디오방송을 위해 편곡활동을 함. 초기에는 서양음악의 편곡에 머물렀으나 한계를 느끼면서 민요나 국악을 서양 오케스트라에 맞춰 편곡. 이러한 민요의 편곡은 당시 큰 인기를 얻었으며, 또한 이 시기에 단소, 피리, 가야금과 서양 오케스트라를 위한 협주곡도 작곡, 편곡하기 시작함. - 1962-1963년 경희대학교 교수를 사직. ‘예그린 악단’의 편곡자로 입단. 뮤지컬 음악이나 무용음악에도 관심을 보임. - 1963년 국악예술고등학교의 강사로 활동하면서 많은 민속 음악인들과 교류. 이시기에 본격적으로 국악에 관심을 갖게 됨. - 1965년 서울시립국악관현악단에 입단. 남도민요를 관현악으로 편곡함. - 1967년 서울시립국악관현악단의 상임지휘자가 됨. 한국전통음악의 창작을 본격화하는 시기로 민요 편곡과 협주곡, 무용음악과 영화음악을 작곡함. - 1974년 예그린 악단이 국립가무단으로 개칭되면서 초대 단장으로 취임. 다수의 뮤지컬 작곡. - 1982-1988년 서울예술전문대학 국악과 교수로 활동. - 1988년 이후 KBS 국악관현악단, 서울 시립국악관현악단. 부산 시립국악관현악단에서 작 품을 위촉받아 창작활동을 함. - 2001년 사망. 김희조는 한국 전통음악의 대중화와 현대화에 크게 기여한 작곡가로 평가된다. 그는 관현악, 민요합창, 무용음악, 영화음악, 뮤지컬 등 여러 장르에 걸쳐 많은 음악을 작곡했으며, 그 과정에서 서양음악과 한국의 전통적인 민속음악의 결합을 통해 전통음악을 현재에 살아 숨쉬게 하고 널리 보급하는 데 큰 역할을 하였기 때문이다. 김희조는 전문적인 음악학교에서 정규 음악교육을 받은 작곡가가 아니었다. 음악이 좋아 음악에 입문했고 독학과 개인지도를 통해 음악을 공부했다. 그리고 직업연주가에서 직업작곡가로, 당대의 다른 작곡가들과는 다른 음악가의 길을 걸었다. 그는 직업이 요구하는 대로 다양한 종류의 음악을 썼고, 그 현장경험을 체화하여 서양음악과 한국 전통음악뿐만 아니라 전문성과 대중성이 공존할 수 있는 새로운 음악을 작곡하였다. 김희조는 군악대, 방송, 뮤지컬, 무용, 영화 등의 다양한 분야에서 작곡가ㆍ편곡가로 종사하면서 각 분야가 요구하는 많은 다양한 음악을 남기면서도 어느 분야에서든 “서양의 고전음악에 익숙한 귀에 한국음악을 편하게 이해시키는데 도움이 되는 작품”을 쓰고자 일관된 길을 걸었다. 군악대 음악의 한국화나 편곡을 통한 민요의 보급, 한ㆍ양 합주라는 연주형태의 정착, 창과 관현악의 결합, 국악관현악을 위한 협주곡 형식의 완성 등은 서양음악과 전통음악의 결합을 통해 전통음악을 현대화하고 대중화하고자 한 그의 노력의 결과인 것이다. 김희조의 군가 및 군악대 음악은 그가 육군 군악대에서 군악대장으로 복무하던 1948년부터 1957년 사이에 편곡, 또는 작곡되었다. 당시 군악대에서 연주하던 곡들은 모두 ≪성조기여 영원하라≫ 등의 미국곡이나 독일, 프랑스의 행진곡들이었다. 그러한 상황에서 그는 행진곡을 우리 것으로 대체하는 일에 관심을 기울였다. 그가 시도한 방법은 우리민요나 당시 널리 보급된 우리 노래를 행진곡에 사용하는 것이었다. 그는 민요 ≪방아타령≫을 브라스 밴드곡으로 편곡을 하였고, ≪밀양 아리랑≫, 가곡 ≪바우고개≫, ≪고향 그리워≫를 사용하여 행진곡을 작곡ㆍ편곡하여 군악행진곡을 ‘한국화’하며 널리 보급하였다. 또한 많은 군가들이 작곡되었는데 ≪우리는 대한국군≫과 ≪대한의 방패≫, ≪개선행진곡≫ 등은 그의 대표적인 군가로 널리 불려졌다. 김희조는 많은 수의 한국 전통음악을 수집하고 편곡했다. 그가 민요를 오선보로 채보하고 편곡하기 시작한 것은 1958년으로, KBS 스몰 오케스트라의 상임지휘를 맡은 것이 그 계기가 되었다. KBS 라디오의 ‘수요일 밤의 향연’이란 프로그램을 위해 민요 ≪울산아가씨≫, ≪보리타작≫, ≪아리랑≫, ≪밀양아리랑≫, ≪베틀가≫, ≪방아타령≫, ≪뱃노래≫, ≪농부가≫, ≪한강수타령≫ 등을 편곡하였고, 이러한 민요의 채보 및 편곡은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이루어졌다. 1962년에는 ≪경복궁타령≫, ≪신고산타령≫, ≪옹헤야≫ 등의 민요를 편곡하였으며, 1968년 서울시립국악관현악단의 지휘자로 활동할 때에는 남도민요 ≪뱃노래≫, ≪새타령≫, ≪보렴≫을 채보하여 관현악으로 편곡하였다. 1980년에는 『혼성민요합창곡집』을 출판하였다. 이 작품집에는 ≪울산아가씨≫와 ≪천안삼거리≫를 비롯하여 경기지방의 들노래 ≪호미걸이노래≫, 서울의 답교놀이에서 불리었던 선소리 ≪놀양≫, 판소리 심청가 중 ≪뱃노래≫ 등 다양한 노래가 수록되어 있다. 김희조가 민요를 편곡한 것은 서양음악에 익숙해져 있는 국민들에게 민요를 널리 보급하기 위해서였다. 그는 단선율인 민요를 서양음악의 화성을 사용하여 큰 규모의 합창곡으로 편곡하였고, 그 과정에서 노래가 반복될 때 리듬으로 다양한 변화를 주며 반복의 단조로움을 극복하고자 하였다. 그의 민요합창곡은 대부분 일관된 편곡상의 양식을 보여주었다. 김희조의 이러한 민요 채보와 편곡은 당시 사람들에게 시들해져 있던 민요에 대한 관심을 고조시키고 널리 보급시키는데 큰 역할을 하였다. KBS 스몰 오케스트라의 상임지휘자 시절, 민요 편곡과 때를 같이 하여 김희조는 전통음악을 서양 관현악곡으로 편곡하고 한ㆍ양 합주를 위한 음악을 시작하였다. 특히 단소, 피리, 가야금 같은 한국 전통악기와 서양관현악단을 위한 협주곡을 작곡ㆍ편곡하였다. 초기의 작품으로는 ≪피리와 관현악을 위한 민요 스케치≫(1957), ≪단소와 관현악을 위한 수상곡≫(1958), ≪가야금 산조와 관현악을 위한 협주곡: 성금연 류≫(1958)가 있다. 이 작품들은 피리, 단소에 능한 국악인으로서 서양악기도 많이 다룰 줄 아는 이병우, 가야금 산조의 대가 성금연 등과 함께 작업하여 녹음하고 방송한 후 큰 호응을 얻었다. 이후 전업 작곡가로서 자유로운 활동을 하면서 ≪한ㆍ양 합주를 위한 ‘봄의 찬가’≫(1988), ≪플루트 독주와 국악합주를 위한 무용환상곡≫(1989), ≪서양 오케스트라에 의한 김죽파 산조≫(1996), ≪한ㆍ양 합주를 위한 ‘아름다운 농촌풍경’≫(1997, KBS 국악관현악단 100회 연주기념 위촉) 등을 작곡했다. 이 가운데 ≪플루트 독주와 국악합주를 위한 무용환상곡≫은 최초로 서양악기인 플루트와 국악관현악단의 협주를 위한 작품이며, ≪한ㆍ양 합주를 위한 ‘아름다운 농촌풍경’≫은 국악관현악단과 서양관현악단이 함께 연주하도록 한 음악으로, 농촌생활과 그 환경을 상상하면서 농민들의 희로애락을 총 7악장으로 그려낸 큰 규모의 작품이었다. 김희조가 뮤지컬에 관심을 갖고 작품을 쓰게 된 시기는 그가 1962년부터 ‘예그린 악단’과 인연을 맺고 그 뒤를 이어 서울시립국악관현악단의 상임지휘자와 국립가무단의 단장으로 활동하였던 시기였다. 그의 최초의 뮤지컬은 1968년에 작곡한 ≪대(大) 춘향전≫이었다. 예그린 악단에 의해 1968년 2월 23일 초연된 이 작품은 전체가 2부10장으로 구성되었는데 추천가, 관등가(탑돌이 춤), 가면무 등으로 향토적인 분위기와 대중성을 깊이 고려하였다. 이 작품은 당시 한국적 뮤지컬의 이정표를 세운 작품으로 평가되었고 이후 1974년 국립가무단의 제1회 공연을 위해 개작되었으며, 1985년(세종문화회관)과 1994(예술의 전당)의 공연을 거쳐 작곡가가 타계한 후에 ≪성춘향≫이란 제목으로 2002년에도 공연되었다. 김희조의 국립가무단 시절은 그의 집중적인 뮤지컬 창작 시기였다. 그는 국립가무단을 이끌면서 한국적 뮤지컬의 성패는 ‘고전 음악의 현대화 내지는 민중적 예술로서의 부각’에 달려 있다고 봄으로써 뮤지컬 방향을 ‘우리 전통적인 선율 속에 서구식 경쾌한 리듬을 적절히 안배’하는, 즉 우리 전통음악의 현대화로 잡았다. 그는 1974년 ≪시집가는 날≫에 이어 다수의 작품을 남겼고, 국립가무단을 떠난 이후에도 계속해서 뮤지컬을 작곡했다. 그의 뮤지컬 대본은 대부분 우리 고전을 토대로 하고 있다.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대 춘향전≫(1968), ≪종이여 울려라≫(1972, 예그린 악단이 공연, 에밀레종 설화를 소재로 함), ≪시집가는 날≫(1974), ≪상록수≫(1975), ≪태양처럼≫(1976, 안시성 성주 양만춘을 주인공으로 함), ≪심청전≫(1976), ≪달빛나그네≫(1978, 서동설화를 소재로 함, 서울시립가무단 창단공연), ≪양반전≫(1986, 서울시립가무단(현 서울시뮤지컬단)이 ‘86 아시안게임 문화예술축전공연의 일환으로 위촉, 1987년에는 88올림픽 홍보를 위해 미국 순회공연. 국제적 수준의 한국적 뮤지컬이라는 호평을 받음), ≪아리랑 아리랑≫(1988, 88예술단 위촉), ≪님을 찾는 하늘소리≫(1993, 유치진의 희곡 ≪가야금≫을 토대로 한 음악극으로 가야의 우륵을 소재로 함)를 꼽을 수 있다. 김희조의 다수의 뮤지컬 가운데 특히 ≪성춘향 2002≫는 ‘우리 전통음악의 현대화’와 ‘민중적 예술’로서의 뮤지컬이라는 작곡가의 작곡방향을 가장 잘 보여주는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이 작품에서 김희조는 전통적인 선율과 리듬에 삼화음 중심의 화성어법을 사용하여 서양음악과 한국음악을 결합시켰을 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쉽게 이해하고 접근할 수 있게 하였다. 이러한 노력과 시도는 그의 다른 뮤지컬에서도 쉽게 찾아 볼 수 있다. 김희조의 뮤지컬은 뮤지컬이라는 장르를 한국화하고 대중화하는 데 크게 기여한 것으로 평가되었다. 뮤지컬 음악을 집중적으로 작곡하던 시기에 김희조는 무용음악도 작곡하였다. 국립무용단 제9회 공연을 위해 ≪종송≫(1967, 구성•안무: 송범)에 음악을 썼고, 이후 ≪심청전≫(1976년, 김백봉 안무, 국립무용단 제15회 정기공연, 무용극)과 ≪춘향전≫(1977년, 송범 안무, 국립무용단 제19회 정기공연), ≪마음 속에 이는 바람≫(1978년, 송범 안무, 국립무용단 제21회 정기공연), ≪처용≫(1981년, 임성남 안무, 창작발레)을 남겼다. 김희조는 또한 영화음악에도 많은 관심을 보였다. 그는 1960년대와 1970년대에 걸쳐 60여 편의 영화음악을 작곡했는데 1971년에는 ≪내 아내여≫로 대종상 음악상을 수상하기도 하였다. 한국적 인물과 사건을 다루는 영화의 음악을 맡으면서 그는 국악기와 서양악기를 효과적으로 사용하거나 또는 민속적인 선율이나 창을 사용하여 토속적인 분위기를 잘 표현해 냈다. 주요한 작품으로는 ≪젊은 표정≫(1960, 감독: 이성구), ≪귀거래≫(1960, 감독: 이용민), ≪종자돈≫(1967년, 감독: 김진규), ≪메밀꽃 필 무렵≫(1967), ≪장군의 수염≫(1968년, 감독: 이성구), ≪당신≫(1968년, 감독: 이성구), ≪여진족≫(1969년, 감독: 이규웅), ≪결사대 작전≫(1969년, 감독: 고영남), ≪마님≫(1970년, 감독: 주동진), ≪내 아내여≫(1971년, 감독: 유현목), ≪분례기≫(1971년, 감독: 유현목), ≪춘향전≫(1971년, 감독: 이성구), ≪고종황제와 의사 안중근≫(1972년, 감독: 주동진), ≪난중일기≫1977), ≪을화≫(1979년, 감독: 변장호) 등이 있다. 김희조는 서울 시립국악관현악단 상임지휘자 시절에 창과 관현악을 위한 음악을 작곡함으로써 새로운 연주형태를 시도하였다. 그는 1971년에 ≪범피중류≫(심청이 공양미 삼백석에 팔려 선인들을 따라가는 장면을 그린 대목)와 ≪거문도 뱃노래≫를 창과 관현악의 연주형태로 편곡하여 창과 관현악을 위한 음악이라는 새로운 음악, 또는 연주형태를 정착시키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이후 판소리 ≪춘향가≫ 중 <사랑가>(1982)와 ≪심청가≫ 중 <황성 가는 길>(1985)을 비롯하여 심청가, 흥보가, 춘향가, 수궁가 등, 판소리의 중요한 대목을 거의 창과 관현악 형태로 옮겼다. 또한 ≪놀량≫, ≪새타령≫, ≪김매기 노래≫, ≪상주 모심기≫, ≪농부가≫, ≪풍년노래≫, ≪방아타령≫, ≪육자배기≫, ≪자진육자배기≫ 등 많은 남도민요와 경기민요도 창과 관현악 형태로 편곡하였다. 창과 관현악이 함께 어우러지는 연주형태는 창에 관현악의 음향을 도입함으로써 입체적인 효과를 얻었다. 국악관현악과 관련하여 김희조 음악의 본령으로 평가되는 작품은 ‘합주곡’이었다. 이 합주곡이란 명칭은 1960년대 김용진과 이성천 등에 의해 명명되고 사용된, 서양의 심포니에 비견되는 국악분야의 순 기악합주를 위한 음악형식이었다. 김희조는 1982년 ≪합주곡 제1번≫을 발표한 이래, 1999년까지 모두 11곡의 합주곡을 작곡했다. 1번부터 6번까지는 절대음악의 범주에 속하며 7번부터 11번까지는 모두 부제를 가지고 있다. 그의 합주곡은 민속악의 장단과 선율들을 다채롭게 변화시켜 사용함으로써 국악으로 연주되는 관현악곡 창작을 위한 하나의 좋은 모델이 되고 있다. 1999년 작곡가 팔순기념으로 한국창작음악연구회에 의해 11개 합주곡을 담은『김희조 합주곡 전집』이 출판되었다. 김희조의 합주곡은 국악관현악을 위한 순수창작곡이었다. 따라서 합주곡은 그 어떤 작품보다도 작곡가의 작곡기법과 양식을 잘 보여주는 작품이라 할 수 있다. 그가 남긴 11개 합주곡 가운데 부제를 사용한 작품(합주곡 8번, 9번) 외에 그의 합주곡은 모두 양식상의 공통점을 보여주었다. 주제의 제시와 다양한 전통장단을 이용한 주제의 변주가 바로 그것이었다. 그는 주제의 구성에서는 서양 음악작법을, 주제의 변주에는 다양한 전통장단을 사용함으로써 서양음악과 한국 전통음악을 결합하고자 하였다. 이러한 구성은 음악의 이해를 어렵지 않게 하면서도 단조로움을 피할 수 있어 대중적인 호소력을 지니게 하였다. 여기에 한국 전통악기와 음계의 사용은 그의 합주곡을 더욱 한국적이게 했다. 1980년대 말과 1990년대에 들어서서 김희조는 국악기와 국악관현악의 협주용 작품들을 많이 남겼다. 아쟁, 가야금, 대금, 해금, 거문고 등의 국악기를 독주악기로 사용하고 있는데, 특히 가야금을 위한 음악이 다수로, 산조풍이 주를 이루는 것이 특징이었다. 중요한 작품으로는 ≪아쟁 독주와 관현악≫(1988), ≪김죽파 류 산조에 의한 가야금 협주곡≫(1991), ≪가야금 독주와 관현악≫(1991), ≪윤윤석 류 산조에 의한 아쟁 협주곡 제2번≫(1991), ≪가야금 협주곡 VII≫(1992), ≪한범수 류 산조에 의한 대금 협주곡≫(1992), ≪해금협주곡≫(1993), ≪7현 거문고 독주와 관현악을 위한 ‘비현’≫(1993), ≪가야금 3중주 협주곡≫(1994), ≪성금연의 흥을 주제로 한 가야금 협주곡≫(1995), ≪서용석 류 대금 산조를 위한 협주곡≫(1995) 등이 있다. 김희조는 한국의 일반 작곡가들과는 달리 직업작곡가로서 활동하면서 그의 직업이 요구하는 음악을 작곡하였다. 따라서 다양한 종류의 많은 음악을 남겼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작품에는 일관되게 나타나는 특징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한국 전통음악과 서양음악의 공존이었다. 그는 군악대 음악이나 뮤지컬 같은 서양의 음악장르에서는 한국적인 분위기를 나타내기 위해 우리의 전통적 장단이나 음계, 한국적 정서를 대표하는 가곡 등을 재료로 사용하였으며, 전통 민요에는 서양음악의 화성을 사용해 화현적인 민요합창곡을 만들었다. 그리고 그 경험을 바탕으로 국악관현악단을 위한 새로운 합주곡 형식을 시도하고 정착시키는 데에도 큰 역할을 했다. 김희조의 음악은 복잡하거나 어렵지 않았다. 그것은 일차적으로 그가 작곡했던 음악장르가 행진곡이나 뮤지컬, 합창곡 같은 대중적인 장르에 국한되고, 따라서 그가 사용한 서양음악의 작곡기법과 화성어법이 18, 19세기의 전통적 틀을 벗어나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한 발 더 나아가 생각해 보면 이는 그의 음악관에서 비롯된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는 예술인이기 보다는 직업인이기를 더 원했던 작곡가이었다. 그는 직업과 주어진 역할에 성실하게 임했고, 그 결과 한국사회가 요구하는 음악을 쓰게 되었다. 그에게 중요하고 새로운 것은 서양음악과 전통음악의 결합을 통한 국악의 현대화, 대중화였고, 서양음악이 주류가 되어버린 당대 우리 음악의 한국화였다. 참고문헌 김택완. “김희조와 그의 음악.”『음악과 민족』 제27호, 부산: 세종출판사, 2004. 김희조. 『알기 쉬운 작곡법』. 서울: 세광음악출판사, 1981. 노동은. 『노동은의 음악상자』. 서울: 웅진출판사, 1996. 윤중강/김용현. 『북에는 김순남 남에는 김희조』. 서울: 민속원,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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