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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루흐, 막스 [Bruch, Ma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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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루흐, 막스 (Bruch, Max 1838.1.6 쾰른 - † 1920.10.20 베를린 근교 프리데나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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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작곡가.  브루흐의 작품 중심은 오케스트라 반주로 된 대 규모 합창음악이다. 19세기 후반 시민 합창 문화를 주도한 대표적인 작곡가 중의 한 사람이다. 낭만주의자였고 또 낭만주의자로 머물렀다.

음악교육. 
최초의 음악교육은 당시 라인 주(Rheinland) 에서 성악가로 유명했던 그의 어머니로부터 받았다. 1949년 이후로는 아버지의 친구이자 본(Bonn) 대학 음악 감독이었던 브라이덴슈타인(H. C. Breidenstein)에게 음악을 배웠다. 브루흐는 일찍부터 음악적 재능을 보였다. 9살에 처음으로「부모에게 드리는 노래」(Lied an die Eltern, 1847)를 어머니 생일을 위해 작곡했고,  이후로 소규모의 곡들 모테트 · 피아노 소곡 · 바이올린 소나타 · 현악 4중주 · 7중주(1849) · 서곡 등을 작곡했다. 14살에 작곡된 그의 심포니는 쾰른에서 연주되었다. 어린 시절 작곡된 이러한 곡들은 대부분 전해지지 않는다. 이 중에 현악 4 중주곡으로 브루흐는 프랑크푸르트 모차르트 재단의 상을 받았고(1852), 이 재단 장학생으로 이듬해  힐러(F. Hiller)에게 작곡을 라인엑케(K. Reinecke)와 브로이눙(F. Breunung)에게 피아노를 배웠다. 그의 첫 번째 낭만주의 희가극『해학, 책략과 복수』(Scherz, List und Rache, 1858)가  쾰른(Köln)에서 초연 되었는데, 이 작품으로 힐러에게 4년간의 작곡 수업(1853-57)은 끝을 맺었다.

연구 여행.
오페라 상연이 끝난 직후 브루흐는 힐러의 조언을 받아  연구 여행을 시작하였다(1858). 먼저 브루흐는 당시 음악의 중심지였던 라이프찌히(Leipzig )로 갔는데, 그곳에서  영향력 있는 멘델스존 서클의 음악가들(리츠[J. Rietz], 라인엑케[C. Reinecke], 모쉘레스[I. Moscheles])과 사귀었고 또 중요한 라이프찌히 음악 출판업자들도 알게 되었다. 이듬해(1859) 그는 본(Bonn) 대학에서 2학기 동안 역사 · 문학 · 미술사를 공부하였고, 이어 쾰른으로 돌아와 약 2년간 음악교사로 일 하였다. 그가 계속하여 독일과 오스트리아 각지를 여행한 후 만하임 (Mannheim)에 정착(1862-1864)한 것은 만하임 궁정악장 라흐너 (V. Lachner)에게 호의를 느껴서이다. 브루흐는 라흐너에게 지휘, 관현악법을 배웠다. 1863년 만하임에서 초연 된 낭만주의 오페라『로렐라이』(Die Loreley)는 라흐너에게 헌정되었다. 

오케스트라와 합창 지휘자.
브루흐가 첫 번째 얻은 고정된 직책은 코블렌츠(Koblenz)의 음악 감독(1865-67) 자리였다. 그 후 튀링엔(Thüringen) 지방 존더스하우젠(Sondershausen) 궁정악장(1867-70)이 되었는데, 이 시기에 그의 유명한 바이올린 협주곡 1번 g 단조가 완성 되었고, 요아힘(Jos. Joachim )에 의해 브레멘(Bremen)에서 초연(1868)되었다. 이 때에 또 슈피타(Ph. Spita)와  친구가 되었는데,  그와의 절친한 관계는 브람스와 가까워지는 것 뿐 아니라 또한 브루흐가 ‘문화 항의 적’(kulturprotestantisch) 기본입장을 점차 뚜렷이 갖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출판업자인 심록크(Fritz Simrock)와의 계약도 이때 맺어지는데, 브루흐는 1869년부터 1890년간의 작품 출판을 그에게 위임하였다.
존더하우젠의 악장 직에서 물러난 후에는  베를린(1871-73)과 본(1873-78)에서 살았다. 이 때가 브람스에게는, 어느 곳에도 메이지 않는 자유로운 음악가로서, 창작에 새로운 방향이 정립된 결정적인 시기였다.  브루흐가 독일 민족오페라 작곡을 계획하고 있었던 1871년 브루흐는 호메로스(Homer)의 작품을 읽었는데, 이것들은 그의 관심을 완전히 오라토리오로  바꿔놓았다. 이리하여 『오디세우스』(Odysseus, 1871/72)가 창작되었고, 후에『아킬레우스』(Achilleus,1885)가 그 뒤를 이어 작곡되었다.  브루흐는 자주 특정한 연주단체나 독주자들, 또는 황제의 생일 같은 특별한 날을 위해 작곡하였는데, 본에서 살던 시기의 작품 중 『스코틀랜드 판타지』(Schottische Fantasie, 1879/80)와 바이올린 협주곡 2번(1877)이 바로 이러한 곡으로 절친한 사이였던 사라사테(P. de Sarasate )에게 헌정되었다.

1870년대 말 영국과의 관계가 활발하여지자 브루흐는 그동안 임시 협력관계로 일하던 베를린 슈테른 합창단 지휘(1878-80)를 사임하고, 리퍼풀(Liverpool)로 가서 음악 감독(1880-83)이 되었다. 이 시기에 브루흐는 그와 약혼관계에 있던 오페라 가수(앨토) 클라라 투체크(Clara Tuczek)와 베를린에서 결혼(1881)식을 올렸다. 클라라는 브루흐의 수많은 가곡 작품에 영감을 주었을 뿐 아니라, 연주회에서 남편의 작품을 연주하기도 하였다. 리퍼풀 음악 감독 시절 브루흐는 많은 제안을 받았는데 그 중 하나가 미국 연주 여행이다(1883).  브루흐는 심포니 협회들의 초청을 받아 약 8주간에 걸쳐 뉴욕, 보스톤, 클리블랜드, 필라델피아, 시카고 등지를 연주 여행하였다. 총 20회의 연주회가 개최되었는데 대부분 브루흐는 자신의 작품을 직접 지휘하였다. 이후로 그의 음악은 미국에 널리 알려졌다.
연주 여행을 마치고 유럽으로 돌아온 그해 가을, 브루흐는 항상 바래왔던 지속적인 지휘 자리에 초빙되어 브레슬라우(Breslau)로 갔다.  브레슬라우 오케스트라 지휘기간(1883-90)동안 브루흐는 7번의 연주 시즌을 이끌었는데, 수많은 탁월한 독주자들을 브레슬라우로 초청하였다. 이중 작곡가들도 몇 몇 포함되었는데 그리그(Grieg), 생상(Saint-Saens)은 자신들의 피아노 협주곡을 연주하였고, 브람스는 새로 작곡한 자신의 심포니 4번을 직접 지휘하였다. 기악 연주자들과 독창자들은 종종 브루흐의 친구들이거나 동료들이었다. 많은 음악가들도 새로 알게 되었는데   특히 요아힘(A. Joachim)과 슈피스(H. Spies)는 브루흐의 가수에 대한 이상을 구체적으로  실현시킨 여성 가수들이었다. 
브레슬라우에서의 초기 지휘생활은 성공적이었지만 마지막은 그렇지 못했다. 브루흐가 브레슬라우를 떠나게 된 이유는 정치그룹들과 의견 불일치 때문이었다. 대략 1885년 이후 브루흐는 솔리스트 선발과 그의 보수적인 프로그램 구성 문제들로 인하여 반대에 부딪히기는 하였지만 점차 확대되는 대립관계의 근원은 정치적인 이유 즉, 브루흐의 비스마르크에 대한 충성이 그 원인이었다. 

베를린 음악원 교수.
브레슬라우 연주 위원회와의 긴장이 고조되자 브루흐는 오케스트라 지휘를 사임하고 브레슬라우를 떠나 베를린 근교 프리데나우로 이사하였다 (1890.9). 이듬해 베를린음악원의 작곡 마스터 클래스  교수가 되었고(1891), 은퇴(1910) 할 때까지 이 직에 머물렀다. 1890년 이후 국제적인 명예가 브루흐에게 주어졌다. 특히 본의 베토벤하우스 협회 명예회원(1890)이 되었고, 바이에른 막시밀리안의 공로훈장(1892)과  캠브리지 대학의 명예 박사학위(1893)를 각각 받았고,  빠리 예술아카데미 회원(1898 ) 등을 지냈다.
 
이상형 멘델스존.
브루흐는 일찍이 그의 동시대인들로부터 멘델스존의 후계자로 인정받았다. 이미 프랑크푸르트 모차르트 재단 장학생이었던14 살 때부터  멘델스존과 비교되었다. 이에 대한 이유를 찾는다면 브루흐가 멘델스존의 전통에 뿌리를 박고 있는 힐러에게 배운 점과 쾰른과 라이프찌히 음악원의 중요한 음악가들과  절친한 관계, 또 라이프찌히에 체류(1858) 했던 사실 등이다. 브루흐는 멘델스존이 일찍 죽은 것을 매우 유감으로 생각했다. 만일 그가 죽지 않았다면 그의 제자가 되었을 것이다. 브루흐는 멘델스존의 서거 50년에 즈음하여 가족과 동료들 앞에서 그에게 경의를 표하는 연설을 하였다(1897.11.4). 그 연설은 멘델스존의 작품에 나타나는 형식 · 멜로디 · 음향 미 · 고전적 구조를 경탄하는, 일종의 그의 우상  멘델스존에 대한 열광적인 숭배였다. 브루흐는 특히 그가 천직으로 생각했던 영역에서 멘델스존의 후계자였다. 이것은  칸타타『프리툐프』(Frithjof) 에서부터 시작하여 후기 오라토리오『모세』(Moses) 와『구스타프 아돌프』(Gustav Adolf) 에 이르는 콘서트홀을 위한 극적인 합창 작품들을 통하여 증명된다.

브람스의 그늘.
브람스(J. Brahms)는 브루흐에게 동맹자였고 동시에 경쟁자였다. 여러 번 사람들은 브루흐 보다 브람스를 더 선호했다. 한 예로 힐러는 1884년 쾰른 음악원 감독 겸 시립 악장의 자리에서 물러날 때 자신의 후임자로 첫째 브람스를 지명하였고 두 번째가 브루흐였다. 그러나 그 후임 자리는 브람스가 되지 않았고 프란츠 뷜너(Franz Vüllner)가 되었다. 1893년 캠브리지 대학 음악 단체의 기념제 때에도 독일을 대표하여 브람스가 명예박사 후보로 먼저 추천되었다. 브루흐는 브람스가 거절한 후에야 비로소 추천 되어 명예박사를 받았다. 브루흐는 브람스보다 단지 5살 아래였고 또 사적으로는 이처럼 경쟁관계에 있기도 하였지만, 그는 평생 브람스를 높이 존중하였다 (1868년 심포니 1번은 브람스에게 헌정되었다). 브루흐는 브람스가 죽은(1897) 후 23년이나 더 살았다.

민속음악.
브루흐도 브람스와 다른 작곡가들처럼 민요를 애호하였다.  민요에 대한 그의 특별한 관심은 성악과 피아노를 위한 작은 규모의 가곡에서 뿐 아니라『스코틀랜드 판타지』 · 『콜 니드라이』(Kol Nidrei) 같은 대 규모의 협주곡에서도 나타난다.『콜 니드라이』는 히브리 선율에 의한 작품이다. 바이올린과 오케스트라를 위한 협주곡 op. 84 의 마지막 부분에서는 아일랜드 민요가 사용되었다. 오케스트라 모음곡 op. 79b 에서는 러시아 민요가, 북유럽 모음곡(1906)에서는 스웨덴 민요가 각각 사용되었다.

합창음악.
브루흐가 작곡가로서 두각을 나타낸 것은 1864년의『프리툐프』를 통해서이다. 이 작품은 아이스란드 전설에 의한 소프라노 · 바리톤 · 합창 · 오케스트라를 위한 칸타타이다. 그의 7곡의 오라토리오는 바그너의 음악극에 반대하는 작품으로 작곡되었다 (2곡은 출판되지 않음). 이 오라토리오들은 10년 동안 독일과 영국의 큰 합창단에서 연주 되었다. 세속적인 내용의『오디세우스』는 지금까지 대부분 성서의 내용에 근거했던 오라토리오 역사에 중요한 의미를 부여한 작품 중의 하나이다.『모세』이전의  브루흐의 오라토리오들은 세속적 이야기들인 신화 · 전설 · 역사적 소재들이 사용되었다.  

주요작품 (출판 연도)

1.오페라
『해학, 책략과 복수』(Scherz, List und Rache), 1막, op. 1 (1858);
『로렐라이』(Die Loreley), 4막, op. 16 (1863);
『헤르미오네』(Hermione), 4막, op. 40 (1872).

2. 오라토리오 
『오디세우스』(Odysseus) op. 41 (1872);『아르미니우스』(Arminius) op. 43 (1875);『아킬레우스』(Achilleus) op. 50 (1885);『모세』(Moses) op. 67 (1894);『구스타프 아돌프』(Gustav Adolf) op. 73 (1898).

2. 칸타타
『자작나무와 오리나무』(Die Birken und die Erlen) op. 8 (1859);『프리툐프』(Frithjof) op. 23 (1864);『 아름다운  엘렌』(Schön Ellen) op. 24 (1867);『불의 십자가』(Das Feuerkreuz) op. 52 (1889);『종의 노래』(Das Lied von der Glocke, 쉴러,) op. 45 (1878); 『날라와 다마얀티』 (Nala und Damajanti) op. 78 (1903); 『부활절 칸타타』(Osterkantate) op. 81 (1908 경).

3. 합창곡 
3. 1 오케스트라 (또는 오케스트라와 오르간) 반주로 된 합창:
 『유빌라테, 아멘』 (Jubilate, Amen) op. 3 (1858 경); 남성 합창곡 op. 19 (1864 경);『예수님 가족의 피신』 (Die Flucht der heiligen Familie) op. 20 (1864 경); 남성 3부를 위한『동방박사 세 사람의 노래』(Gesang der heiligen drei Könige) op. 21 (1864경); 『살라미스』(Salamis) op. 25 (1865경); 『아버지 무덤 위의 프리툐프』 (Frithjof auf seines Vaters Grabhügel) op. 27 (1868); 『로라테 코엘리』 (Rorate coeli) op. 29 (1871); 『이집트로 피신』(Die Flucht nach Ägypten)  op. 31/1 (1869); 『아침』(Morgenstunde) op. 31/2 (1869); 바리톤과 1부 남성합창을 위한『노르만인의 행렬』(Normannenzug) op. 32 (1869경); 이중합창『키리에, 쌍투스, 아뉴스테이』 (Kyrie, Sanctus und Agnus Dei) op. 35 (1870); 『로마의 장례식』 (Römische Leichenfeier) op. 34 (1870); 『독일 황제의 노래』 (Das Lied vom dt. Kaiser ) op. 37 (1871); 6성부를 위한『디오니소스 송가』(Dithyrambe) op. 39 (1871경); 남성 합창 2곡『테르모필레』(Thermopylä op. 53 (1889); 거룩한 밤에 부치는 인사 (Gruß an die heilige Nacht) op. 62 (1892);『찬가』(Hymne) op. 64 (1893); 바리톤과 남성합창을 위한『레오니다스』(Leonidas) op. 66 (1893); 새로운 남성 합창 op. 68 (1896); 『마지막 작별』(Der letzte Abschied des Volkes) op. 76 (1901); 바리톤과 합창을 위한『노래의 위력』 (Die Macht des Gesanges, 쉴러) op. 87 (1912); 6성부 합창『영웅축제』(Heldenfeier) op. 89 (1915경); 『히브리 노래』(Hebräische Gesänge, 1888); 『어머니 대지의 음성』(Die Stimme der Mutter Erde) op. 91 (um 1916); 이중합창『미뇽을 위한 장례식』(Trauerfeier für Mignon) op. 93 (1919 경).

3. 2. 피아노 반주로 된 합창: 
여성합창과 독창을 위한『아기 예수 노래』(Christkindlieder) op. 92 (1917 경). 

3. 3. 아카펠라 합창 
혼성 합창 5 곡 op. 38 (1871); 혼성 합창 9곡 op. 60 (1892); 남성 합창 4곡 op. 48 (1881) 합창 가곡『밤에』(in der Nacht) op. 72 (1897);『모리츠 공작』(Herzog Moritz) op. 74 (1899).

4. 독창곡 (오케스트라 반주) 
앨토를 위한『이시스의 여 사제』(Die Priesterin der Isis) op. 30 (1870); 메조소프라노를 위한『마르파의 마약세계』(Scene der Marfa, 쉴러) op. 80 (1906).

5. 가곡 (피아노 반주)
소프라노와 앨토를 위한 이중창 3곡 op. 4 (1858 경); 12개의 스코틀랜드 가곡(1863); 6개의 노래 op. 7 (1859); 소프라노를 위한『힘누스』(Hymnus) op. 13 (1862); 
4개의 가곡 op. 15 (1862 경); 10개의 가곡 op. 17 (1863 경); 바리톤을 위한 노래 4곡 op. 18 (1863 경); op. 33 (1870); 가곡과 노래(Lieder und Gesänge) op. 49 (1882); 가곡과 노래 (Lieder und Gesänge) op. 54 (1891);  바리톤을  위한 5개의 가곡 op. 59 (1892); 여성 2~3성부를 위한 7개의 노래 op. 6 (1859).

기악곡
1. 오케스트라 곡
심포니 (3곡): 1번 Eb 장조 op. 28 (1870); 2번 f 단조 op. 36 (1870); 3번 E장조 op. 51 (1887); 러시아 민요에 의한 모음곡 op. 79b (1903); 북유럽 모음곡(Nordland Suite, 1906).

2. 독주악기와 오케스트라를 위한곡
바이올린 협주곡: 1번 g 단조 op. 26 (1868); 2번 d 단조 op. 44 (1878); 3번 d 단조 op. 58 (1891).

바이올린과 오케스트라를 위한 곡:『로만스』(Romanze) a 단조 op. 42 (1874);『스코틀랜드 판타지』(Schottische Fantasie)  op. 46 (1879/89);『정열적 아다지오』(Adagio appassionato) f 단조 op. 57 (1891);『인 메모리암』(In memoriam) op. 65 (1893); 세레나데 a 단조 op. 75 (1900); 협주곡 f# 단조 op. 84 (1911). 

첼로와 오케스트라를 위한 곡:『콜 니드라이』(Kol Nidrei ) op. 47 (1880/81);『칸초네』(Canzone) Bb장조 op. 55 (1891);『켈트 민요에 의한 아다지오』(Adagio nach keltischen Melodien) op. 56 (1891); 『아베 마리아』(Ave Maria) op. 61 (1892). 

비올라 와 오케스트라를 위한『로만스』(Romanze) F 장조 op. 85 (1911); 클라리넷과  비올라를 위한 이중 협주곡 e 단조 op. 88 (1911); 2대의 피아노를 위한 이중 협주곡 Ab 단조 op. 88a (1915). 

3. 실내악
피아노 트리오 (1곡) c 단조 op. 5 (1858); 현악 4 중주 (2곡); c 단조 op. 9 (1859), E 장조 op. 10 (1860); 현악 5 중주 (1곡); 피아노 5중주 (1곡); 피아노 7중주 (1곡); 바이올린과 피아노를 위한『스웨덴 춤곡』 (Schwedische Tänze) op. 63 (1892); 첼로와 피아노를 위한 4곡 op. 70 (1897); 클라리넷 · 비올라 · 피아노를 위한 8곡 op. 83 (1908).

4. 피아노 음악
네 손을 위한 카프리치오 f# 단조 op. 2 (1858); 피아노 6곡 op. 12 (1861); 두 대의 피아노를 위한 판타지 d 단조 op. 11 (1861); 피아노 2곡 op. 14 (1863).

[참고문헌]
Dietrich Kämper: Max Bruch-Studien, Zum 50. Todestag des Komponisten, Köln 1970.
Karl Gustav Fellerer: Max Bruch 1838-1920, Köln 1974.
Max Bruch/ [Hrsg. : Stadt Köln, Oberstadtdirektor], Köln 1984.
Sonja Luyken: Max Bruch, Köln 1984.
Christopher Fifield: Max Bruch, Biograpie eines Komponisten, Zürich 1990.

등록일자: 2005-01-31
장동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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