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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쓸러 [Haßler, Hans Le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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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쓸러(Hans Leo [von] Haßler, 1564.10.26 세례, 뉘른베르크 - 1612.6.8.프랑크푸르트 마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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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명1

1564년 10월 16일 뉘른베르크에서 세례를 받음, 1612년 6월 8일 프랑크푸르트(마인강 유역)에서 사망.
독일 작곡가. 이삭 하쓸러의 아들. 하쓸러는 베니스에서 안드레아 가브리엘리 등으로부터 수학하였다. 1586년부터 그는 아우구스부르크에서 백작 푸게르 밑에서 오르가니스트로 활동하였으며, 1601-08년에는 뉘른베르크의 제1시립음악가로 활동하였다. 1608년에는 드레스덴의 선제후 궁정에서 일하며 궁정 오르간제작자 푸리체(G. Fritzsche)와 교제하였다. 푸리체는 하쓸러가 고안한 오르간을 1612년에 드레스덴의 성곽교회에 설치하였다. 하쓸러는 당시 매우 존경받는 음악가였으며 특히 성악작품들로 주위에 크게 영향을 끼쳤다. 그의 작품들로는 8성부와 12성부 모테트와 4성부 칸초네가 있다(1590, 뉘른베르크). 이 외에도 5-8성부 마드리갈과, 4-8성부 미사곡, 4-12성부 모테트, 8, 4성부 기악곡들이 있다. 대표작으로는 “신독일노래의 즐거운 정원”(Lustgarten Neuer Teutscher Gesäng...)이 있는데, 이곳에서는 5성부 노래인 “Mein Gemüth ist mir vervirret"가 수록되어 있다. 사랑 시에 기초한 이 곡의 선율은 세상에 알려진지 얼마 되지 않아서 찬송가 ”Herzlich tut mich verlangen"으로 그리고 후에는 요한 크뤼거에 의해 게르하르트의 수난곡 “O, Hauptvoll von Blut und Wunden"에 붙여져 편곡되었다. 하쓸러의 오르간작품들은 이태리 대가들의 영향을 보여준다.

2005-08-05
나진규


설명2

독일 작곡가이며 오르간 연주자. 하쓸러는 독일의 남부 도시 아욱스부르크(Augsburg)와 뉘른베르크(Nürnberg)를 중심으로 16세기말부터 17세기 초에 걸쳐 활동했다. 하쓸러는 이태리에서 유학하여 음악을 공부하여 이태리 음악을 독일에 소개하였다. 당시 독일에 유학하여 어느 정도 작곡가다운 면모를 갖춘 독일인으로서는 그가 최초의 사람이라 할 수 있다. 어릴 때 오르간 연주자였던 아버지 이자크 하쓸러(Isaak Haßler)로부터 음악을 배웠다. 1584년 그는 음악공부를 계속하기 위해 이탈리아의 베니스로 갔다. 하쓸러는 베니스에서 18개월 체류하면서 당시 산 마르꼬 성당의 제1오르간 주자였던 안드레아 가브리엘리(A. Gabrieli)에게 수학하였으며, 그의 조카인 지오바니 가브리엘리(G. Gabrieli)와는 동거하며 같이 공부하기도 하였다. 1585년 독일로 돌아온 하쓸러는 아욱스부르크의 명문이었던 푸거(Fugger) 가문의 백작 옥타비아누스(Octavianus) 2세의 오르가니스트가 되었다. 1591년 하쓸러는 황제으로부터 10년 동안 작품을 출판·보증해주는 특권을 받았다. 하쓸러는 1595년 황제 루돌프(Rudolf) 2세로부터 귀족신분을 부여받았고, 1605년에는 <하쓸러 폰 로젠네크>(Haßler von Roseneck)라는 칭호를 사용할 수 있는 더 높은 신분계급이 되었다. 그는 1600년 바우만(Jacob Baumann)과 함께 아욱스부르크 시에 고용된 악사들의 수장이 되었다. 옥타비아누스가 사망하자 하쓸러는 아욱스부르크를 떠나 1601년 뉘른베르크로 다시 돌아와 이 도시의 최고 음악가로 활약(1601-08)하였고, 또한 "황제 궁정신하"의 칭호와 "궁정 오르가니스트" 칭호도 받았다(1602). 1605년 그는 뉘른베르크 시의회의 승인을 받아 거주지를 울름(Ulm)으로 옮겼고, 그곳에서 상인 가문의 딸과 결혼하였다. 1608년에는 드레스덴(Dresden)에서 작센 선제후의 궁정봉직인 오르간 연주자로 임명받았다.

하쓸러는 세속적인 다성부 가곡과 교회음악 작품을 남겼다. 그는 구교와 신교 양쪽의 음악을 작곡했는데 초기 작품은 모두 카톨릭 교회 음악이었다. 그의 음악은 랏소(Lassus[Lasso], Orlande de)와 베네치아악파 특히 이중합창기법에 많은 영향을 받았다. 이러한 음악적 영향은 그의 『미사』에서 형식적 균형, 특히 온음계의 사용으로 잘 나타나고 있다. 

신교를 위한 전례음악의 중요한 모음집에는 『시편과 교회노래』가 있다. 

오로지 시편송만을 예배 시에 단 선율로 부르도록 하였던 칼뱅(Jean Calvin)의 영향과, 또한 회중이 함께 노래하는 예배의식을 만들고 회중찬송을 장려했던 루터의 영향으로 하쓸러는 루터 파의 코랄을 두 가지 방법으로 편곡하였다. 예를 들면 모음집『시편과 교회노래』에서는 52개의 코랄이 푸가적으로 편곡되었고 『교회노래』에서는 단순한 화성이 붙여졌다. 

하쓸러의 명성은 사후에 증보되어 출판된 20곡의 모테트집인 『거룩한 콘체르토』(Sacri concentus, 뉘른베르크, 1615)가 입증한다. 이 모테트들은 지오바니 가브리엘리의 모테트와 함께 '교회 콘체르토의 거룩한 유품' 같은 가치를 갖는다. 이 곡들에서는 교회선법으로부터 장·단조로의 이행, 그리고 멘수라 리듬으로부터 현대적 박자구조로의 이행이 눈에 띈다.

주요작품집:

 교회음악:

『거룩한 노래』(Cantiones sacrae), 4-12성부 모테트, 아욱스부르크, 1591.
『미사』(Missae), 4-8성부, 뉘른베르크, 1599.
『거룩한 콘체르토』(Sacri concentus), 4-12성부 모테트 및 2,8,4성부의 기악소품,    아욱스부르크, 1601.
『시편과 교회노래』(Psalmen und Christliche Gesäng), 52개의 4성부 시편과 성가곡, 뉘른베르크, 1607.
『교회노래』(Kirchengesäng), 뉘른베르크, 1608.

세속음악:

『칸쪼네타』(Canzonette), 4성부, 뉘른베르크, 1590.
『새 독일 노래』(Neue Teutsche gesang), 4-8성부, 아욱스부르크, 1596.
『마드리갈리』(Madrigali), 5-8성부, 아욱스부르크, 1596.
『새 독일 가곡의 즐거운 뜰』(Lustgarten Neuer Teutscher Gesäng), 뉘른베르크, 1601.   

참고문헌:

F. C. Hartmann: Hans Leo Hassler, Gedenkschrift, Frankfurt, 1969.
W. Wiora: Das deutsche Lied, Wolfenbüttel, 1971.

2005-8-24
장동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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