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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조니 [Busoni, Ferrucci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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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조니(Ferruccio Busoni,  1866플로렌스 근교 Empoli - 1924 베를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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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루치오 부조니

작곡가 겸 피아니스트. 아버지는 클라리넷을 연주하는 이태리 사람이었고, 어머니는 독일 혈통의 피아니스트였다. 부모들은 부조니의 첫 음악선생이기도 했다. 그는 7세 때에 이태리 북부 도시 트리에스테에서 피아노 음악회를 가짐으로써 세상에 소개되었다. 9세 때에 비엔나에서 피아노 연주회를 가졌고, 12세 때에는 부모가 이주하여 살았던 오스트리아의 그라츠에서 지휘를 했다. 그는 15세 때에 그의 첫 작품인 {스타바트 마테르}(1881)를 작곡하여 -모차르트가 그러했던 것처럼- 볼로냐 아카데미의 회원이 되었다. 그는 평생동안 유럽과 미국의 이곳저곳을 다니면서 음악활동을 했다. 1888년 그는 브람스의 추천으로 라이프치히의 라이네케(C. Reinecke)에게 가서 공부한다. 그리고 같은 해에 헬싱키 음악원의 피아노 교수로 일했고 거기에서 스웨덴 출신의 조각가의 딸과 결혼하였다. 1890년에는 루빈슈타인 상을 받은 후 모스코바 음악학교의 교수가 되었다. 하지만 다음 해에  보스톤으로 옮겨간다. 1894년에는 베를린 연주여행을 하고, 1907년에는 사우어(E. v. Sauer)의 뒤를 이어 비엔나 음악원의 교수가 된다. 하지만 곧 베를린으로 되돌아간다. 1913년에는 볼로냐 음악학교(Liceo musicale)의 교장이 된다. 1차 세계대전 중에는 취리히에서 살았다. 1919년 베를린 대학에서 명예박사학위를 받는다. 1920년 베를린 예술학교(Akademie der K nste)에서 마이스터 과정의 작곡과 학생들을 지도하였다(그의 후계자로 1924년 쇤베르크가 온다) . 당시 그는 피아니스트로 대단한 명성을 누렸다. 그는 리스트를 자주 연주했는데, 1911년 베를린에서 리스트 탄생 백주년을 기념하는 리스트 음악회를 여섯 번이나 열었다. 그리고 리스트 전집의 교정을 맡기도 하였다.  그런가하면 바흐의 평균율에 해석을 달았고, 바흐의 오르갠 음악을 피아노를 위해 편곡하기도 했다. 그는 모차르트 역시 즐겨 연주했다. 그리고 새로운 음악을 연주하기 위해 지휘봉을 잡기도 했다. 
그의 작품 {대위법적 판타지}(Fantasia contrappuntistica, 1910)는 강력하게 바흐 지향적인 자세를 보여준다. 그런가 하면 그의 {희극 서곡}(Lustspiel-Ouvertüre opus 38, 1904)는 모차르트적인 성향을 드러낸다. 무용곡들은 스카를랏티를 생각나게 한다. 그런가 하면 {피아노와 오케스트라를 위한 협주소곡(Konzertstück für Klavier und Orchester opus 31 a, 1892)은 브람스의 영향을 보여준다. 또한 {카르멘 주제에 의한 소나타네}(Sonatina super Carmen, 1921)는 리스트의 음악성향을 드러낸다. 한편으로 현악사중주 작품 19와 28(1886, 1889) 그리고 바이올린 협주곡 35a(1899)는 베토벤의 흔적을 보인다. 그 외에도 브람스, 코르넬리우스, 골드마르크, 베버, 바그너, 쇤베르크의 음악을 사용하였다. 이렇게 그는 다른 작곡가들의 음악을 자신의 음악에 끌어들이거나 편곡하거나 일을 많이 했다. 편곡에서는 원곡의 특징들이 그대로 살아 있었다. 이런 과정에서 옛 음악들은 현대화한 모습을 보여기는 하지만 한쪽 방향으로 계속 발전시키지는 않았다. 
미국여행을 통한 인디안 음악의 흔적도 나타난다. 그의 {피아노를 위한 인디안 일기}(Indianisches Tagebuch für Klavier, 1915)와 {피아노와 오케스트라를 위한 인디안 판타지}(Indianische Fantasie für Klavier und Orchester, opus 44, 1914)가 바로 그런 것들이다. 후자는 피아니스트를 위해 대단히 장인적인 내용을 가지고 있으며 인디안 선율과 찬송가 선율을 사용한 것이다.  그는 이태리 사람답게 오페라에도 관심이 많아서 4개의 작품을 남겼다. 그의 오페라 {신부 고르기}(Die Brautwahl, opus 45, 1912)는 상당히 성공적이었다. 그리고 {아를렉키노}(Arlecchino 1917)", {투란도트}(Turandot 1917)는 같이 작곡되어 동시에 무대에 올려진 작품이었다. 부조니의 마지막 오페라 {파우스트 박사}는 미완성으로 남았으나 야르낙흐(Ph. Jarnach)에 의해 완성되어 그가 죽은 다음 해인 1925년 드레스덴에서 초연된다. 그는 이 작품의 대본으로 괴테의 것을 사용하지 않고 옛 인형극의 것을 사용하였는데, 이는 일반적으로 그의 대표적 오페라로 평가된다. 
그는 {새로운 음악미학의 시도}(Entwurf einer neuen  Ästhetik der Tonkunst 1907, 1954)라는 책을 써서 새로운 음악의 창조를 위해 이론적인 활동을 펼치기도 했다. 그는 거기에서 조성이 무조성으로 이전되어야한다고 말하여 새로운 음악을 미리 예견하고 있었다. 그는 이를 위해 이론적인 대안을 만들기도 했다. 즉 1/3음과 1/6음으로 구성된, 18음으로 이루어진 음계로 작곡할 것을 주장하였다. 이런 혁신적인 면은 당시의 보수적 작곡가 피츠너(H. Pfitzner)와 대립각을 이루었다. 새로운 음악이 시작되자 그는 1922년 공개적인 서한을 통해 "새로운 고전성"을 주장한다. 그의 생각은 당시 신고전주의적 작곡가들, 예를 들어 스트라빈스키, 힌데미트 같은 작곡가들에 의해 작품으로 현실화된다. 하지만 그 스스로는 자신의 의견대로 작곡하지는 않고, 앞의 작곡가들보다 더 보수적인 입장을 보여주었다. 하지만 예외적으로 {바이올린과 피아노를 위한 소나타 작품 36a 1899)와 같은 데에서 조성적, 리듬적 실험이 있는 변주부분이 있다.
부조니는 신음악이 범람하는 20세기 중반 이후부터는 거의 잊혀진 작곡가 취급을 받았다. 하지만 2000년이 되기 직전, 즉 1990년대 후반에 다시 광범위하게 연주, 연구되는 작곡가로 떠올랐다.   

참고문헌: H. Leichtentritt, {F. Busoni}, 1916. G. Selden-Goth, {F. Busoni}, 1922.  S. F. Nadel, {F. Busoni}, 1931. E. Debusmann, {F. Busoni}, 1949. H. H. Stuckenschmidt, {F. Busoni}, 1967. H. Meyer, {Die Klaviermusik F. Busonis}, 19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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