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 나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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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주리: 20세기 음악과 회화에서의 푸가
[The Fugue Reflected on Music and Painting in the Twentieth Century]
서양음악학 9-2, 2006, 통권 11호, 99-122.
1. 들어가는 말
요한 세바스티안 바흐(Johann Sebastian Bach, 1685-1750)의 대표적인 음악 ‘형식’으로 꼽히는 푸가는 바흐 음악의 본질과 가치를 독창적, 독자적으로 재발견함으로서 ‘바흐 르네상스’를 이끌어낸 19세기의 낭만주의 작곡가들1)에 의해 “최고의 성격소곡, 고유의 표현양식과 특유의 빛과 그림자를 요하는 진정한 시(詩)적 음악”2), 혹은 기괴하고 그로테스크한 것을 묘사하기에 적합한 ‘형식’으로 간주되면서,3) 당시 주요 음악장르로서의 위치를 차지하지는 못했지만, 그 유기적이고 조직적인 구조와 구성, 은밀하고 차원 높은 음악적 표현으로 작곡가들을 매료시켰다. 20세기에 들어서 푸가는 작곡가들의 작품창작에서 양적인 ‘발전’과 질적인 ‘변화’를 겪었을 뿐 아니라, 음악학자와 음악이론가들의 주요 논제로도 부각되었다. 이는 창작분야에서 점차 그 중요성을 더해가는 (바흐의) 푸가의 본질과 정체성, 푸가 고유의 ‘무형식적’ 전개방식을 다시 한 번 학문적, 이론적으로 정립하려는 시도였다.
20세기 전반기에 푸가가 작곡가들의 관심을 모았던 것은 한편으로 반낭만주의적인 음악관과 함께 간명한 음악적 표현, 형이상학에서 벗어난 절대음악, 수공업적이고 구조를 강조하는 작곡기법을 추구하는 새로운 음악미학의 결과였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전통과의 단절, 급변하는 미학적, 작곡기법적 양식 안에서 바흐의 음악이 그 어느 것에도 비견될 수 없는 음악예술의 견고한 토대이자 전형으로 이해, 수용되었던 데에 그 이유가 있었다. 이렇듯 푸가창작이 급격히 늘어가는 가운데 음악학자와 음악이론가들은 작곡가들 못지않게 다양한 푸가관을 제시했고, 더 나아가 푸가창작에 영향을 미치거나, 혹은 낭만주의시대의 작품들과 비교해 볼 때 형식적, 양식적으로 크게 변화된 당시의 푸가작품들을 설명할 수 있는 이론도 정립했다.
바흐의 음악과 푸가에 대한 생산적인 관심은 음악 분야를 넘어 회화에까지 미쳤다. 특히 푸가는 20세기 초 대상의 재현으로부터 벗어나 순수하고 절대적인, 그리고 추상적이고 엄격하게 구조적인 예술을 지향하던 화가들의 작품주제로 부각되었고, 그리하여 쿠프카(František Kupka, 1871-1957)의 《무정형, 2색의 푸가》(Amorpha, Fuge in zwei Farben, 1913), 칸딘스키(Wassily Kandinsky, 1866-1944)의 《푸가》(Fuga, 1914), 횔첼(Adolf Hölzel, 1853-1934)의 《부활의 주제에 의한 푸가》(Fuge über ein Auferstehungsthema, 1916), 클레(Paul Klee, 1879-1940)의 《붉은 푸가》(Fuge in Rot, 1921), 누보(Henri Nouveau, 1901-1959)의 《그림으로 표현한 요한 세바스티안 바흐의 E♭단조 푸가 마디 61 1/2 - 66》(Graphische Darstellung der Takte 61 1/2 - 66 der Es-moll-Fuge von Johann Sebastian Bach mit dem 26., 27. und 28. Themeneinsatz, 1928) 등의 작품들이 탄생했다. 이 작품들은 20세기 초반기의 푸가 수용관 뿐 아니라, 음악과 회화의 상호작용 측면에서도 새로운 면모를 보여주었다.
본 논문은 우선 20세기 음악에서의 푸가 수용관, 즉 이 시기의 음악학자와 음악이론가들, 작곡가들의 푸가에 대한 관점을 이들의 글과 작품양식을 통해 알아보고, 나아가 같은 시기의 회화에서 음악 ‘형식’인 푸가가 어떻게 이해되고 수용되는지, 또한 어떠한 이유와 방식으로 그 본질을 달리하는 예술장르로 재탄생되는지 알아보는데 그 목적을 둔다. 그리고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는 극도로 혁신적인 음악과 회화 양식, 다시 말해서 총열음악, 전자음악, 우연음악 등이 주류를 이루는 음악양식과 추상표현주의, 옵 아트(Op Art), 미니멀아트, 팝 아트, 극사실주의 등으로 대표되는 회화양식이 이 두 예술분야를 주도하는 가운데 바흐의 음악과 푸가가 현저하게 그 의미를 상실했기 때문에, 본 논문은 고찰 범위를 20세기 전반기의 음악과 회화로 제한한다.
2. 20세기 음악에서의 푸가 수용관
20세기 전반기에는 그 어느 시기와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바흐와 그의 음악에 대한 전기적 저서들이 다량으로 저술되었다.4) 이는 세기 전환기 이후의 급변된 음악적 상황에서 ‘제2의 바흐 르네상스’와 함께 더욱 확고하게 그 의미를 굳혀가는 바흐와 그의 음악을 다시금 학문적으로 고찰함과 동시에 새로운 시대의 바흐상(像)을 구축하려는 의도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바흐가 그의 푸가로 ‘푸가형식’의 극치, ‘푸가형식’의 최고 절정을 이룩해낸 뒤에 후대의 음악학자들과 음악이론가들, 작곡가들에게 ‘푸가형식’은 곧 바흐의 푸가를 의미하기에, 20세기의 푸가 수용관은 우선 바흐 저서들을 통해 진단해 볼 수 있다.
각주 4)에서 열거된 바흐 저서들 가운데 푸가에 대해 언급되는 부분들을 살펴보면, 푸가는 엄격한 규칙에 의거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자유로운 구성 안에서 고유의 음악적 성격을 표현하는 악곡이라는 관점이 두드러진다. 볼프룸(Philipp Wolfrum, 1854-1919)은 바흐 푸가의 정수인 《평균율 클라비어곡집》(Das Wohltemperierte Klavier, 1722, 1744)의 푸가들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구세대 음악학자들이 푸가의 진지함과 엄격함을 강조했다면, 이제 새 세대 음악학자들은 한 걸음 나아가 바흐의 피아노음악언어가 내포하는 지극히 다양한 형태와 성격, 풍부한 표현수단을 주목한다. 프렐류드처럼 푸가도 아주 강한 성격을 지니는 음악이다. 푸가는 자주 우아함, 고상함, 무모함, 기쁨, 애정, 진지함, 신중함, 숙고, 비탄, 멜랑콜리, 죽음에 대한 동경 등을 강렬하게 표현한다. 하지만 어떤 푸가들은 ‘주관’의 영역으로부터 벗어나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평균율 클라비어곡집》의 푸가들을 볼 때 우리에게 밀려오는 느낌, 그 느낌으로 이 대가의 푸가를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각각의 푸가는 그 특별한 본질에 걸맞게 특별한 형태를 띤다. 그리고 바흐의 푸가는 주제라는 씨앗의 열매이며, 바로 그 주제에서 정교하고 논리적으로 발전되어 나온 결과물이다. 그러나 그 엄청난 정교함은 겉으로 비쳐지는 것과는 달리 단지 수단일 뿐, 결코 목적이 아니다.”5)
이렇듯 볼프룸은 (바흐의) 푸가를 주제를 근간으로 하여 형성된 논리적인, 그러나 정해진 틀에 매어있지 않은 형식이 특정한 성격 표현에 종속되어 있는 일종의 ‘성격소곡’으로 보았는데, 이와 유사한 견해는 피로(André Pirro, 1869-1943)6)와 구르리트(Willibald Gurlitt, 1889-1963)7)의 글에서도 발견된다. 베셀러(Heinrich Besseler, 1900-1969)는 더욱 분명하게 푸가를 ‘성격소곡’의 개념과 결부시켰다. 그는 바흐의 주제에 “특유의 정서”가 담겨있으며, 이 새로운 주제로 인해 바흐의 푸가가 ‘푸가형식’의 원칙과 본질을 고수하는 ‘성격소곡’이 되었다고 주장했다.
“... 바흐는 새로운 종류의 푸가주제를 만들어냈다. 그의 주제는 아주 뚜렷하고 독특한 윤곽을 지닌, 그리고 특유의 ‘정서’를 담고 있는 푸가의 시작을 나타내며, 그 특유의 ‘정서’를 한 성부에서 다른 성부로 옮기면서 악곡 전체에 가득 스며들게 한다. 그의 주제는 정교하게 구성되어 있고, 매우 특징적이며, 고전주의시대의 개성 강한 주제와도 유사하다. 이리하여 푸가는, 특히 피아노푸가는 바흐의 손에서 인간적인 것과도 조화를 이루는 일종의 성격소곡으로 거듭난다...”8)
앞서 언급한 것처럼, 바흐의 푸가는 이미 슈만에 의해 ‘성격소곡’으로 해석된 바 있다.9) 이러한 사실은 낭만주의적인 푸가 수용관이 20세기에 들어서도 여전히 존속한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게 한다.
푸가를 규칙과 원칙에 토대를 두면서도 자유로운 구성과 감정의 표현을 가능케 하는 ‘형식’, 혹은 악곡으로 이해하는 경향은 20세기 전반기의 주요 푸가이론서들에서도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리만(Hugo Riemann, 1849-1919)은 “우리는 정말로 엄격한 푸가 형식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 푸가를 지배하는 원칙은 한 없이 다양한 특수기법들을 허용한다는 것, 그리고 원칙을 인정한다고 해서 앞으로의 푸가 발전이 위험에 처하게 되는 것은 결코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10)라고 말했고, 나아가 “푸가양식 개론은 그 규칙과 작법에 관한 설명보다 오늘날의 취향과는 다소 거리가 먼 작곡양식의 걸작들이 지니는 음악적 표현과 불후의 미학적 가치에 대한 관심과 이해를 북돋으려는 노력이 있을 때 가능하다. 이렇게 해야만 초보 작곡가들이 예술적인 상상력을 갖춘 푸가형식도 완전히 자유로운 구성을 허락하며, 획일적이고 융통성 없는 작곡기법은 다른 형식들에서처럼 푸가에서도 비예술적이며 무가치하다는 것을 알게 된다”11)는 소견을 밝히면서 자유로운 구성 안에 내재되어 있는 푸가의 풍부한 표현력과 미학적 가치를 강조함과 동시에 간접적으로 바흐의 푸가를 푸가의 전형으로 제시했다.
20세기 초반기 작곡가들의 푸가 이해와 푸가 창작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친 새로운 차원의 푸가 수용관은 할름(August Halm, 1869-1929)의 저서 『음악의 두 문화에 대하여』(Von zwei Kulturen der Musik)에서 표명되었다. 할름은 푸가에서 나타나는 모든 현상들은 주제와 관련되어 있기 때문에, 푸가형식의 본질적인 특성은 통일성에 있다고 주장했다.12) 또한 그는 푸가를 “수준 높은 기량, 즉 선율을 다루는 기량”13)의 산물로 간주함으로서 푸가의 선율을 강조했고, 바흐의 푸가에서 이상적인 선(線)적 푸가를 발견했다.
“그(바흐)는 화성적 고조현상이 아니라, 대위법적 고조현상을 꾀한다. 선율적인 요소들과 ‘성부들’의 관계성이 증가하고 복잡해지는 곳이 곧 바흐에게 한 악곡의 절정을 의미했다.”14)
낭만주의자들과는 달리 할름은 푸가, 특히 바흐의 푸가를 화성의 제약을 받는 폴리포니 형식이 아닌, 선율적인 대위법, 선(線)적인 대위법을 동인(動因)으로 하는 악곡으로 보았다. 더불어 그는 가장 순수하고 절대적인 음악을 실현해내는 형식은 소나타와 푸가뿐이라고 규정했다.
“우리는 푸가와 소나타를 불안정한 감동과 ‘내적인 체험’, 소위 고상하고 은밀한 동물적 체험을 표현하는 수단이나 감정을 분출하는 대용품으로 사용하는 세련된 속물이 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가장 경계해야 할 것은 이들을 시(詩)적인 즐거움 누리기 위해 연회용 음악으로, 다시 말해서 저속한 예술의 시녀로 전락시키는 것이다. 우리는 이제 다시 이 형식들의 독자성과 자율성을 주시해야한다. ... 그리하면 우리는 이 형식들이 수많은 방해물과 혼란, 실패를 이겨내고 승리하는 가운데 아이디어가 늘어나고 선재(先在)하는 형식이 바람직한 모습으로 구체화되는 것을 느끼게 될 것이고, 결국에는 그저 푸가와 소나타가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이들이 음악의 시작이자 끝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이다.”15)
이로서 할름은 감정과 느낌, 시(詩)적 표현을 음악의 본질과 자율성을 해치는 위험 요소로 간주했다. 그리고 그는 순수하고 절대적인 음악을 보장해주는 푸가와 소나타는 각각 바흐의 푸가와 베토벤의 소나타에서 가장 원숙하고 완벽한 형태로 거듭난다고 역설했다.
(바흐의) 푸가가 선(線)적인 대위법에 의해 형성되고, 고유의 내적 원칙을 바탕으로 구성된다는 관점은 쿠르트(Ernst Kurth, 1886-1946)의 이론의 출발점이기도 하다. 쿠르트는 그의 광대한 연구저서16)에서 새로운 대위법이론을 제시했는데, 그는 여기에서 음악의 ‘움직임’은 음악외적인 요소의 작용 없이 선율에 의해 야기된다고 주장했다. 더 나아가 그는 선율을 정신적, 심리적 상태의 표현, 강렬한 힘의 원천, 그리고 리듬과 화성까지도 포괄하는 역동적이고 일관된 흐름이라고 정의함으로서, 선율을 새로운 대위법이론의 근간으로 지명했다. 따라서 그에게 대위법적인 음악은 에너지로 가득한 선율들의 결합을 의미했고, 이러한 선(線)적 대위법이 가장 두드러지는 음악으로 그는 역시 바흐의 푸가를 꼽았다.
할름과 쿠르트의 이론은 (바흐의) 푸가를 특정한 감정이나 시(詩)적 정서와 같은 음악외적인 것들의 표현이 아닌, 특유한 내적 에너지와 원리를 토대로 전개되는 음악으로 간주하고, 동시에 (바흐의) 푸가의 대위법양식을 화성이 아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