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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음악
홍정수: 한국교회 성가대의 초기 역사
5,074회
한국교회 성가대의 초기 역사

홍정수 

{교회와 신학  1994. 5.10. 제26집, 532-553쪽}

  

1.시작하면서

한국교회의 성가대가 어떻게 시작되었는지,그리고 어떻게 성가대의 음악이 교회에 수용되었는지,교회와 한국음악계에 어떠한 영향을 미쳤는지는 잘 알려져 있지 않다.이 분야에 관한한 극심한 자료 부족과 연구부족이 두드러진다고 말할 수 있다. 교회음악 뿐만 아니라 한국의 양악계에도 성가대의 역할이 컸으리라고 추측되는 것이 사실이지만,한국성가대의 역사에 관한 심도 있는 연구는 아직까지 없었다.이 글 역시 제한된 자료를 가지고 한 작업이라서  불충분한 부분이 많다.특히 평양 장대현교회와 서울 정동제일교회의 성가대를 중심으로 다룰 수 밖에 없었다.여타의 교회에 관해서는 추측조차 할 수가 없는 경우가 많았고, 다룰 수 있다고 해도 지엽적인 것에만 국한될 수 밖에 없었다.

여기에서는 한국 성가대의 초기를 임시적으로 대략 1920년대까지 본다.이는 1920년대에 지방에(군과 읍 단위의 교회)까지 성가대가 활약하고 있었던 것과 관련된 시기설정이다. 내용이 그 이후의 시기에 관해서도 초기와 관련되는 것이 있을 때에는 조금씩 다루었다.

성가대라는 명칭은 1945년 이후에 점차로 정착된 것으로 보이며,그 이전에는 찬송대(讚頌隊),찬미대(讚美隊),찬양대(讚揚隊),또는 아주 드물게 창가대(唱歌隊)와 합창대(合唱隊)라는 명칭을 혼용했다.이 글은 성가대라는 명칭을 사용했으나, 이는 옛 시대에도 그랬다는 것이 아님을 밝혀둔다.

 
2.성가대 설립 이전의 성가합창 문제

아펜젤러의 1987년 4월 11일의 일기를 보면 부활절  예배에 성가대가 노래했다는 기록을 볼 수 있다:"성가대에서 훌륭하게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를 찬양했다."1) 이는 외국인들의 예배에서 있었던 일이다.이 때에 부활주일이 아닌 경우에도 성가대가 있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이러한 일이 당시의 한국인 만의 교회에도 있었는지는 알 수 없다.

1887년 이전에 학생들이나 교인들이 합창(合唱)했다는 기록이 자주 나타나는데,이는 오늘날의 제창(齊唱)과 같은 의미로 생각된다.그런 기록들은 소수의 학생들이 제창한 것을 두고 말했으리라고 짐작된다.교회의 정식 성가대가 발족하기 전에 어떤 특별한 행사에서는 성가대가 동원된 것으로 판단된다.예를 들어 1913년 12월 21일에 있었던 개성북부교회(감리교회) 예배당 봉헌식에는 설교 후와 헌당예식 후에 찬송대가 노래했다는 기록이 있다(대한 그리스도 회보 1913.12.8[교음사료1,51]).이 행사에는 밴드까지 동원되었는데,이러한 점이 음악적으로 제창을 넘어서는 것으로 생각하게 한다.

1897년 이후 기독교 학교의 학생들이 성가대의 역할을 대신하는 일이 상당히 많았다.그중에 가장 먼저 시작한 학교는 이화학당으로 짐작된다.

이화학당에서는 1897년부터 합창 과목을 두어 미스 피어스(Miss Pierce)가 2부로 하는 합창을 지도하게 된다.학생들은 학당의 예배와 그밖의 집회에서 합창을 했다.2) 1816년 정동제일교회에서 있었던 성탄절 예배에서 이화학당 학생들 중심의 성탄절 축하 음악예배 광경이 6항(성탄절)에 소개되어 있다.이렇게 합창을 할 수 있는 사람들은 주로 학생들이었다.다 커버린 사람들은 그런 음악을 하기에는 적절하지 않았다.나중에 음악가의 길로 들어서는 사람들은 한결같이 학생시절에 서양음악에 접한 사람들이이다.따라서 한국교회의 초기 합창 (또는 중창) 음악은 모두 나이 어린 학생들에 의해서 이루어진 것이라고 생각하면 틀림이 없다.후에 평양 장대현교회에서 최초의 성가대도 13세 이상의 남자로 구성된 것이었다.     

 
3.평양 장대현교회 성가대 

한국교회에서 성가대의 시작을 비교적 자세히 알려주는 기록이나 증언은 흔하지 않다.평양 장대현 교회(길선주 목사 시무)가 어떻게 성가대를 시작했는지는 비교적 자세한 증언들이 나와있다.그 증언들이 당대에 나온 것이 아니라서 약간의 결함이 있으리라고 생각되지만,성가대를 시작시킨 당사자들의 증언이기 때문에 상당히 신빙성이 있다고 판단된다.

길선주 목사는 1909년에 한국 전래의 음악으로 교회음악을 만들겠다고 생각하여,자신의 개인 재산을 털어 많은 악사들을 교회에 초빙하여 우리의 가락들과 그 가락에 맞는 성경 구절들을 찾으려고 노력했다.그는 외국의 음악보다 우리의 음악으로 교회음악을 만드는 것이 우리 정서에 더 맞다고 생각했다.사실 그 때에는 사람들이 서양식 노래를 잘 부르지 못하거나 우리 가락식으로 부르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그런데 마지막 문제는 그 가락을 편곡하는 것이었다.그는 그  당시 일본에 가서 음악공부를 하던 김영환(7항 참조)이 방학 때에 평양에 오자 그 편곡의 일을 부탁했다.그러나 김영환은 그가 작곡을 배운 사람이 아니라서 편곡을 할 수 없다고 말했다.3) 그후 길선주 목사는 청년부를 활성화 시키기 위해 성가대를 만들기로 결심한다.그러나 교회 내에는 성가대를 지도할 사람이 없었다.그래서 선교부에 선교사 음악지도자를 요청한다.

장대현 교회 성가대를 만들어 지휘한 미국 북장로교 선교사 마우리(Eli M.Mowry,한국명:牟義理)4)는 1970년에 길선주 목사의 아들 길진경 목사에게 한 편지에서 그 성가대의 시작을 다음과 같이 증언한다:

" 내가 바라기는, 그 교회의 성가대 조직에 관한 더 정확한 기억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나에게 주어진 임무는 교회의 일을 돕는 것이었는데,특히 젊은이들을 위해 뭔가 하는 것이었습니다.나는 어떻게 하면 음악을 더 개선할 수 있을까 하는 강한 소원을 가졌습니다.나의 음악적 능력은 매우 제한된 것이었지만 나의 아내와 나는 성가대의 탄생에 있는 힘을 다 했습니다.나의 아내는 성가대를 위해 접을 수 있는 조그마한 풍금을 연주했습니다.성가대는 남성으로 밖에 할 수 없었습니다.왜냐하면 당시의 관습이 혼성 성가대를 만드는 것을 불허했기 때문입니다.시작한 시기는 1913년 또는 1914년으로 생각 됩니다.내가 틀릴 수 있겠지만,나는 이 성가대가 한국 최초의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그것은 4성부로 노래하는 최초의 시도였습니다.4성부로 부르는 것이 단지 노래만을 부르는 교인들을 위해서는 좋은 노래부르기 방법이 아닐 것이라는 생각을 가끔 했습니다.그러나 이 성가대는 한국 전체를 통해 예배의 아주 좋은 부분으로 발전하는 출발점이 되었습니다."5)

그러니까 장대현 교회의 성가대가 출발한 해가 1913년인지 1914년인지는 확실치 않다6).길진경은 장대현 교회 당회가 1913년에 청년운동과 성가대의 일을 마우리 선교사에게 맡겼다고 말한다.7)

남자들로만 구성된 성가대는 어디에 앉아야 하는가 하는 것도 그리 작은 문제가 아니었다.왜냐하면 당시에는 교회의 좌석에 남녀의 구별이 있었고,심지어는 남자와 여자가 교회에 출입하는 문이 서로 달랐으며,남녀 좌석 사이에는 서로를 볼 수 없게하는 휘장이 있었기 때문이다.남자들만의 성가대는 당연히 남자 쪽에 자리해야 했지만,그 좌석이 앞에 놓이고 회중석을 향해야 했기 때문에 성가대원들이 여자를 볼 수 없도록 고심해야 했다.마우리 선교사에 의하면 그 어려움은 다음과 같이 풀렸다. 

"나는 우리가 특별히 선택한 곡들을 오후예배에서8) 노래했던 첫 시도를 아직도 뚜렷이 기억하고 있습니다.그 집회에서 성가대가 강대상(講臺床)이 있는 강단 위에서  노래하는 것을 동의 받는 데에 어려움이 있었습니다.그러나 성가대가 노래 부른 후에 곧장 남자들 좌석쪽으로 간다는 조건하에  동의 되었습니다.나 역시 성가대가 강단 앞의 낮은 단과 긴 의자에 앉기를 원했는데,마지막에 그렇게 동의되었습니다.그러나 남녀 좌석 사이의 칸막이를 충분히 높이 올려서,성가대원들이 여자쪽을 내려다 볼 수 없도록 했습니다."9)

처음 성가대가 하는 합창 소리를 듣고 난 후의 반응은 마우리 선교사의 음악제자 중 하나이자 작곡가인 김세형(金世炯)의 글로 알 수 있다.사람들은 처음으로 듣는 사부 합창이 "합창대가 찬송가를 잘 부르지 못한다고 생각하였으며 또 노래가 잘 되지 않는다고 생각하였다.그러나 해를 거듭하여 오랫동안 합창을 들어온 일반신자들은 차차 찬양대가 부르는 합창에 취미를 갖게 되었다."10) 김세형의 글에서 알 수 있듯이 아주 초기에는 성가대가 찬송가를 사부로 하는 정도였던 것으로 짐작된다.

또한 김세형의 글 가운데 특기할 만한 증언 한 도막은 남자들만의 성가대에 자극을 받아 소녀들만의 성가대가 장대현 교회 안에 조직되었다는 부분이다.그러나 정확한 연대기록이 없어서 어느 시기에 이 소녀 성가대가 발족했는지를 알 수 없다.단지 최초의 성가대에 자극을 받아 같은 교회 안에 또다른 성가대가 탄생하는 계기를 준 것을 알 수 있다.

장대현교회는 성가대 구성 이후 관악대도 구성했다.물론 이 일에서도 마우리 선교사의 역할이 컸다.그는 숭실전문학교 학생들과 장대현교회 청년들에게 서양 악기를 가르쳤다.그래서 당시의 몇몇 연주자들이 배출된다.길진형(바이올린),박윤근(풍금,피아노),김형재(트럼펫,코넷),김인환(트롬본)11),이성식12),길진주13)  등이 그들이다.관악대원들도 때때로 성가대와 함께 연주했다.

장대현교회 성가대가 활기를 띠기 시작한 것은 1918년 이후부터라고 마우리 선교사는 말한다.그 이유를 마우리는 두가지로 말한다.첫째로 그 해에 마우리는 미국에 가서 모금한 돈으로 어느 정도 규모가 있는 파이프 오르간(이층 건반과 페달 달림)을 가져왔고,둘째로는 미국의 우스터 대학(Wooster College)에서 음악을 공부하고 돌아온 박윤근이 반주를 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14) 1918년대의 장대현 교회의 성가대원 명단이 길선주 목사의 일기책에 다행히 아직까지도 남아있다:한영길 차재일 박인황 배흥권 이인선 고덕영 임익찬 임현길 김병오 박현근 박정근 김만형 정경필 이윤섭 고영수 박요한 박경호 권용덕 박관해 길진경.이들은 모두 13세에서 30세에 이르는 소년과 청년들이었으며,모두 청년회원들이었다.15)이 사람들 중에 가장 음악가로서 활약이 두드러지게 되는 사람은 테너 이인선(李寅善)과 지휘자 박경호(朴慶浩)이다.16)

성가대원이 가장 필요한 것은 악보의 문제였다.악보들은 번역되었고,번역된 것은 여러 사람이 보기 위해 등사(騰寫)되었다.지금은 복사기 때문에 없어져버린 등사기의 작업은 그리 간단한 것은 아니었다.샌드페이퍼처럼 껄그러운 철판 위에 초를 먹인 얇은 종이를 올려놓고,그 종이에 철필(鐵筆)로 악보를 그려넣고 난 후에,그 종이 위로 잉크를 뭍힌 롤러가 지나가도록 하면,철필이 지나간 부분만 잉크가 통과하여 보통 종이에 악보가 그려지도록 하는 것이 등사였다.우리나라 성가대의 악보는 처음부터 이 등사 방법에 의존했다.마우리 선교사의 얘기를 들어보자.

"찬송가반을 위한 것이든지 성가대용 성가곡이든지,모든 특별한 음악들은 등사되어야 했습니다.수년이 지난 후에는 특별한 음악을 등사한 우리의 책은 상당한 분량으로 불어났습니다."

당시에 어떤 곡을 불렀는지를 전체적으로 다 알 수는 없지만 그래도 몇십 편의 곡을 알 수 있다. 그 곡들은 1923년 평양 야소교서관(耶魚禾敎書館)에서 발행한 『음악대해』(音樂大海)에 실려 있다.이 책의 서문은 장대현교회의 담임목사였던 길선주가 썼고,편집인은 그 교회 성가대원이었던 한영길(韓永吉)과 박경호(朴慶浩)였다.이 책은 오늘날 보는 음악통론에 흡사한 음악기초이론의 입문서인데,악보는 책 뒤에 부록으로 달려 있다.물론 거기에는 성가대용 곡이 아닌 기독교 학교의 교가들도 들어 있고17),졸업가·외국민요·찬송가 등도 소수 들어있다.성가대용으로 보이는 곡들은 다음과 같다:

·예수께서 부활하심(남성용)
·우리의 낙원(남성용)    
·아름다운 곳(남성용)
·감람산 골자기에 근심 (남성용)
·믿음의 좋은 싸움 (혼성용,프랑스 국가에 가사를 붙인 곡)
·갈릴리 (혼성용)
·전파하라 (남성용)
·다시 만날까 (남성용)
·기이한 소식을 전함 (혼성용)
·안식세계를 향함 (남성용)
·개선가 (남성용)
·즐거운 성 (남성용)
·하나님은 우리 피난처 (혼성용,구노 작곡:Glory and Honour)
·주를 영접하라 (남성용)
·기쁜 소식 (남성용)
·영광 (남성용)
·파도 세상 (남성용,찬송가
·복지에 있는 나의 평안 (남성용,흑인영가:Stael away)
·예수는 나의 힘 (혼성용,찬송가) 

남성용과 혼성용이 14대 5가 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이 곡들은 당시에 남성만으로 구성된 장대현교회 성가대의 사정을 반영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또한 혼성용은 거의가 찬송가에 해당하는 것이기 때문에,이 곡들은 원래 성가대용이라고 생각하기 어려운 점도 있다.모든 곡들에 작곡가의 이름도 없고 가사 번역가의 이름도 없다.이로 보아 작곡을 누가 했는지에 관한 관심이 전혀 없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위의 곡들 중에는 모방양식의 정통적 교회음악 보다는 호모포니적으로 쉽게 할 수 있는 음악이 대부분이다. 음역이 보통 찬송가들 보다 조금 넓은 것은 있지만,일반적인 노래에서 보는 박절적 규칙성이 남아있는 것이 대부분이다.오늘날도 불리우는 "아름다운 곳"이라는 노래는 찬송가와의 음악적 틀과 큰 차이를 보이지 않는다.1.2.3..절 등으로 만들어진 장절 형식도 그렇고,길이도 찬송가 길이를 넘지 않는다.좀 긴 곡이라고 한다면,"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를 들 수 있다. 이 곡은 합동찬송가(17장'천부를 찬양하라')와 새찬송가(660장 '온 세계 만민 다 기쁜 찬미하여라')에까지 수록되어 내려오다가 통일찬송가(1983년)에 이르러서야 찬송가로부터 사라진 곡이다.이 곡을 회중이 같이 하기에는 무리가 있다.그래서 찬송가에 실렸을 때에도 성가대용으로 사용되었다.이 곡을 제외하고는 모든 곡들을 '합창노래'의 범위에 속하는 것으로 보아도 무방할 듯하다.찬송가보다 약간 더 어려운 이 곡들은 우리나라의 초기 성가대가 하기에도 별 부담을 느끼지 않았으리라고 생각된다.단지 당시에 큰 어려움이 되었던 것은 악보읽기였을 것으로 짐작된다.이 부분은 몇번 반복하는 것으로 되지 않고 상당한 정도로 시간을 들여야 하기 때문이다.음악 이론서인 <음악대해>는 악보읽기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방편으로 나온 것으로 보아도 무방하리라.

장대현교회 성가대가 생기고 난 후,다른 교회에서도 성가대들이 구성된다.그 파급은 대단히 빠른 것이었는데,이를 마우리의 증언으로 알 수 있다: 

"나는 내가 책임을 맡았던 대동강 지역의 몇몇 부락 교회들과도 함께 일을 했습니다. 네다섯 개의 교회가 흥미를 보였고 풍금을 배우고 자기네들 교회의 성가대를 조직하기 위해 평양시로 젊은이들을 보내 왔습니다.문발 섬18)의 교회가 아마도 가장 뛰어났을 것입니다.그 교회는 8명의 남자와 8명의 여자로 성가대를 출발시킬 정도로 용감했습니다."

이렇게 하여 평양 근교의 교회들도 매우 빠른 속도로 성가대를 갖기 시작했다.김세형의 증언에 의하면 마우리가 농촌지역 교회의 음악발전을 위해 상당히 애쓴 것으로 되어있다.마우리는 농촌지역의 청년들 중에서 사람을 선택하여 풍금을 가르쳤고,그들은 한 주일에 한번씩 평양에 와서 마우리 선교사의 부인에게 레쓴을 받았다.그들은 각자 자신의 교회에 돌아가 찬송가 반주를 맡았고,성가대를 조직하였다.마우리 박사는 평양의 유능한 음악인들을 농촌에 데리고 가서 시골의 신자들도 교회음악을 들을 수 있도록 한다.19)

이렇게 시작한 장대현교회 성가대는 많은 교회의 모델이 되어 성가대가 한국 전체로 퍼지는 시발점이 된 것으로 보이며,한국 양악 초기에 유난히 많은 평양 출신 음악가들은 장대현교회와 숭실학교의 음악활동과 깊은 연관이 있는 것으로 판단된다.또한 고향이 경상도인 권태호(權泰浩,안동 출신)와 박태준(朴泰俊,대구 출신)도 평양에서 학교를 다니며 음악의 길에 들어선다.


4.서울 새문안교회와 정동제일교회

한편으로 서울의 성가대는 어떠했는가에 대해서 알아보자.서울은 이미 1900년경년부터 찬송가부르기로 유명했다.당시에 유행하던 말 중에 "평양 믿음,서울 찬미,연백천 깃대"(그리스도 신문.1902.2.2720))라는 말이 있는데,이는 서울의 찬송가부르기가 두드러진 현상이었음을 알게 한다. 왜 이러한 말이 나왔는가는 그 다음에 설명이 되어 있다:"셔울인즉 사나희 교우들이 다 녀학도의 찬미 곡됴랄 좃차 본밧아 하난고로 이러한 소문이 난거시오".그러니까 서울의 교회에서는 여자들이나 하는 노래를 남자들도 같이 하기 때문에 "서울 찬미"라는 말이 나왔다는 것이다.그럼에도 서울의 경우는 성가대의 출발이 평양보다 늦었을 것으로 짐작된다.이는 마우리 선교사가 장대현교회 성가대를 한국 최초의 것으로 조심스럽게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그러나 서울에도 거의 같은 시기에 성가대가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지금까지 나타난 문헌에 의하면 1914년 2월 10일에 새문안교회에 찬미대(讚美隊)가 있었던 것을 당시의 제직회록에서 확인할 수 있다.21) 그러나 다른 문헌이 아직까지 발견되지 않았기 때문에 새문안 교회의 초기 성가대에 관해서는 더 자세한 사항을 알 수 없다.따라서 새문안교회 찬미대가 임시적으로 이루어지는 기구였는지,아니면 매주일 예배에 서는 상설기구였는지 확언하기 힘들다. 

거의 같은 시기의 정동제일교회(초기의 이름:정동교회)는 어떠했는지에 관해서는 자세히 알려져 있다.『정동제일교회 90년사』는 정동제일교회의 성가대가 "국내 최초,최고의 성가대"라고 말하고 있다.그러나 그 책이 말하는 내용대로라면 국내 최초일 수 없다22):

"우리 교회의 성가대가 제대로 훈련받은 정식 지휘자와 네개의 파트를 완전히 갖춘 성가대로 출발한 것은 1929년 가을부터의 일이었다.그 이전에는 예배시에는 독창이나 여성 이중창 내지 또는,여성합창이 있을 뿐이었다."

이러한 증언으로 보아 정규적 성가대의 출발은 대단히 늦었던 것으로 생각된다.1929년전에는 이화여전 학생들이 특별순서를 많이 담당했던 정동제일교회는 비록 정규 성가대는 아니었을지라도,그들에 의한 상당한 음악활동이 있었는데,이런 점이 정식 성가대의 발족을 오히려 늦게 만든 결과를 초래한 것으로 보인다. "서울 찬미"라는 말이 나오게된 것도 정식 성가대 출범 이전에,즉 이화여전 학생들이 교회 찬양을 맡았을 때이었다.

정동제일교회 성가대가 1929년부터 본격적인 출발을 볼 수 있었던 것은 성가대를 지도할 수 있었던 인물이 온 것과 관련이 있다.그 해에 이화여전에 성악 교수로 부임한 여자 선교사 메리 영(Mary E.Young)은 이화여전 학생들이 주축이 된 성가대를 정식으로 발족시킬 수 있었다(한 해 전에 이화여전에 성악과가 설립됐었다).메리 영의 지휘 시기는 1929에서 1934까지였다23).이 시기는 정동제일교회 성가대가 장안의 화제가 될 정도로 여러가지 면에서 두드러졌다.당시에 서울을 포함한 한반도 남쪽에서 유일했던 파이프 오르간은 비교인들에게까지 흥미의 대상이 되었고,성가대나 오르갠 소리를 듣기 위해 교회에 오는 일도 있었다.소설가 방인근은 당시의 정동제일교회의 음악을 자신의 느낌과 함께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24):

"풍금 소리는 장엄하고 온화하고 점잖고 신성한 음향이다.정동 예배당의 「파잎올간」은 더욱 좋다.그 풍금소리를 마추어 수백수천의 신도가 찬미하는 고음저음 남성여성이 열려진 창문이 좁다는듯이 터져나온다.예배당 안에서 찬미하는 것보다 밖에서 멀리 듣는 것이 얼마나 더 음악적 효과가 높아지는지 알 수 없다.그러나 또 들어가서 그들과 함께 찬미를 할 때는 다른 감동이 생긴다.입을 열고 노래할 때 또 군중이 다같이 입을 벌리고 같은 말과 같은 곡조로 부를 때 서로 마음이 통하고 사랑이 통하고 단결의 정신이 은연중 고리처럼 연결하는 신비가 그 찬미활동 안에 생긴다.그리고 자기 자신을 돌아보는 것과 엉클어지고 뭉친 슬픔,괴로움,억울,불평 모든 덩어리가 입을 힘껏 벌리고 우렁차고 시원하게 소리쳐 찬미할 때는 스르르 녹고 풀어지고 다만 마음이 고요해지며 평화하고 깨끗해지는 것이다.이같은 종소리,풍금소리,찬미소리를 가득히 담은 예배당은 서울의 풍경이다."

정동제일교회에 파이프 오르간이 들어온 것은 1918년이었다25).이렇게 음악하는 집단이었던 교회가 바깥 사람들에게 드러났다.이러한 풍경은 서울의 풍경으로 소개되었다. 

1929년대의 정동제일교회 성가대원 수는 16명 정도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그 때에 반주자로는 정애식(鄭愛息,당시의 이화전문학교 피아노 교수)이었고,그녀의 이후로는 김영의(金永義)가 맡았다.당시 성가대원 중에 음악적으로 두드러졌던 사람은 채선엽(소프라노),미쓰 아펜젤러(소프라노,이화여전 교장),김성남(金聖男,앨토),황재황(테너),현제명(테너,후에 작곡가,가끔 노래했다고 한다),김인식(베이스,후에 작곡가),황재경(베이스,후에 목사) 등이었다.이 중 교회적으로 가장 큰 활약을 보인 사람은 채성남,김성남,황재경이었다고 전한다.또한 성가대는 주로 선교사들로 이루어진 미국인들과 함께 한·미 합동성가합창대를 구성하여 교회 밖에서도 연주활동을 했다고 한다 26).
정동제일교회 성가대는 1934년부터 37년까지 작곡가 김인식이,37년부터 45년까지는 안기영,이유선, 이흥렬이 이끌었다27).  

평양의 성가대 운동에는 장대현교회와 숭실학교가,서울의 성가대 운동에는 정동제일교회와 이화학당이었다. 평양에서는  남성성가대로 출발하였는데,서울에서는 이화학당의 여학생들이 성가대 역할을 맡음으로써 후에 오는 본격적인 성가대를 준비했다.물론 서울의 새문안교회가 어떠한 활동을 했는지 잘 알 수 없기 때문에 거기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유보될 수 밖에 없다.평양의 서문밖 교회 역시 교회음악으로 유명한 곳인데,그 교회 성가대역사에 관해서는 지금까지 문헌적으로 알려진 것이 거의 없다.
 

5.성가대의 어려움

한국교회의 초기에 성가대가 세워지기만 하면 안정적으로 운영된 것이 아니라,여러가지 어려움에 시달린 것으로 보인다.특히 지도할 음악가들이 없는 곳에서는 성가대의 지속적 유지가 어려웠던 것으로 보인다.장대현교회의 최초의 성가대원 중 한명이었던 박경호는 1922.2.1일자 기독신보[교음사료1,177]에 "교회음악에 대하야"라는 제목으로 성가대에 관해 다루고 있다.그는 첫 부분에 성가대가 지속적으로 유지되지 못함을 한탄하면서 말을 꺼내는데,그가 하는 말의 중심 내용은 1)찬양대의 영구적 유지에 노력할 것,2)찬양대가 교회에 해독을 끼치는 일이 없도록 할 것,3)성가대 지도자는 음악에 관한 기초지식을 갖출 것,4)4부로 하지 못하더래도 잘 합하는 소리로 할 것이다:

"1)찬양대를 청빙하되 그 유지방법을 완전이 하야 영구히 전진하여야 되겠습니다.이것도 조선사람들이 되야 이럿타고 누가 비우슬른지 알 수 없으나 일반으로 찬양대를 설립하기는 쉽게 자조하는 모양이나 또 업서지기도 너무 쉽게 함이다.어떤 교회는 찬양대를 설립하기만 오륙차이나 되나 실상 교회에 유익 주는 일은 업시 아해 노름갓치 공연히 시간만 허비하는 일이 잇으며 2)심지어 어떤 이들은 찬양대라는 미명하에 교회에 해독까지 주는 일이 업지 안으니 이것은 실노 하나님을 찬미하는 거룩한 기관을 더럽히는 동시에 하나님 압헤 큰 죄악이라 하겠습니다.찬양대는 남녀로 조직함이 조흐나 형편을 따라서 그 설립과 유지를 완전히 하고 영구히 하야 모든 교인으로 하야 모든 교인으로 하야 찬양대의 효력을 충분히 깨닫게 하는 동시에 찬양대가 교회 안에 한 권위를 잡도록 하여야 되겟습니다.3)그 다음에 찬양대를 인도하는 이는 적어도 음악의 대강 상식과 쉬운 「하-모늬」(Harmony)나 짐작하여야 되겟습니다.어떤 이들은 써프래노,알토,테너,뻬이스 사부만 합하면 된다고 맛치 주먹으로 피아노 치는 소리 갓흔 것을 사부합창이라고 강대 우헤서 하고 잇스니 듯는 이에게 악감을 줄 것은 물론이고 시골로인들이 항용 하는 말로 「요즈음 놈들은 찬미를 하여도 별하게 하더라」는 말이 관계치 안케 됨니다.찬양대라면 사부합창이라야만 되는 것이 아니라 이부든지 혹은 멜노듸(Melody)만으로라도 잘 합하야 듯기 조케 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제일입니다."

위의 인용문에서는 당시의 상황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는 내용이 많이 있는데,그 중에서도 음악지도자의 문제는 가장 심각했으리라 생각된다.당시의 교회음악지도자들은 잘 되지도 않는 사부합창을 많이 하고 있었던 것으로 짐작된다.멜로디만이라도 수준에 맞게 하는 것이 좋다는 박경호의 권유는 사부합창이 단선율로 하는 것만 못했음을 알려준다.교회에 해독을 끼친다는 것은 청춘남녀로 구성된 성가대원들 사이에 일어날 수 있는 당연한 일들에 관한 문제를 말한 것으로 짐작된다.이 문제에 대해 박경호는 직접적으로 말을 하고 있지 않으나 "찬양대는 남녀로 조직함이 조흐나"로 연결되어 있기기 때문에 그런 추측이 거의 확실한 것으로 보인다.이 문제는 1902년의 "서울 찬미"를 논하는 글에서도 완곡히 표현되어 있다.거기에는 사나희 교우들이 여학도의 찬미 곡조를 쫓아서 하기 때문에 그런 소문이 났다고 말하고,"부끄러운 것"에 관해 언급한다28):"찬미랄 대신 하야 바라난 우헤 터랄 세울것 갓흐면 붓그러온대 니라지 아니 하리라 서울 교회에 붓그러온 거시 잇사니 아모됴록 바라난 거살 일허 바릴수 잇살 터히오." 이러한 언급들은 당시의 남녀칠세부동석(男女七歲不同席)의 문화에서 나온 것들이다.남녀 신자들 사이에 휘장을 친 당시의 상황에서는 남녀가 휘장도 없는 곳에서 같이 노래한다는 것은 그 자체가 벌써 심각한 문제였다.이런 면을 보게 되면 교회 안에서 성가대는 의도한 일도 없이 남녀간의 간격을 좁혀주는 역할을 했다고 말할 수 있다.  

또한 위의 인용문의 뒤에는 지정된 성가대의 좌석이 없어서 이들이 일어서서 앞에 나아가 찬양을 할 때에 분위기가 나빠지는 것을 말하면서 성가대 좌석을 마련할 것을 촉구한다.이런한 내용들로 보아 성가대의 활동에 도움이 되는 것 보다는 방해가 되는 것들이 더욱 많았으리라는 것을 알 수 있다.오늘날에는 위에서 지적한 문제가 없어졌다.아무리 작은 성가대일지라도 그냥 단선율로 부르는 것이 낫다고 권유 받는 성가대는 거의 없을 것으로 판단된다.

6.성탄절

성가대의 활동이 크게 빛을 발하는 때는 성탄절 때이다.성가대가 없었던 시절 성탄절 예배에서는 찬송가를 계속 불렀던 것을 알 수 있다(예:대한 그리스도회보1898.12.28.[교음사료1,28-29]).그러나 성가대의 출현과 함께 여러가지 다채로운 순서가 혼합된 성탄절의 예배 모습은 많은 사람들에게 매우 놀라운 것으로 받아들여진 것으로 보인다. 이를 보고하는 신문기사에서도 그러한 분위기를 느낄 수 있다.예를 들어 1916년 서울 정동제일교회에서 있었던 이화학당 주최의 성탄절 예배 광경이 그것이다(기독신보 1916.12.20[교음사료1,118]).당시의 정동제일교회는 성가대가 정식으로 출범하기 이전이었는데,이화학당의 학생들이 필요 때마다 성가대의 일을 담당하던 시기였다:"젼도단 벽에는 동방의 세박사가 별을 보고 구세쥬를 차자가난 것이 붓헛스며 단 좌우에는 셩탄목을 세우고 색초를 듬은듬은 꼬잣난대 졸디에 一대의 쳥아한 음악소래가 밧겻으로브터 좃차 드러와 등뒤로 좃차 귀부리를 치난지라.만당 귀빈이 호령 업시 一시에 뒤를 도라보니 교사학생의 혼셩창가대가 배꼿갓치 흰옷을 닙고 노래와 거름을 맛초아 한가온데 길노 들어오더니 강단압헤 와셔난 남북 두단으로 난호와 강단으로 올나가서 별비한 자리에 좌뎡한 후[...] 그 후에는 독챵,二인합창,三인합창,四인합창 혹 사부합창 등으로 노래하매 그 쳥아하고 숙련한 음악은 과연 텬재라 닐캇겟다고 모든 듯난쟈들은 칭찬함을 마지 아니 하더라." 촛불을 든 성가대가 밖으로부터 노래를 하면서 교회 안으로 입장하는 것이라든지,"그 청아하고 숙련한 음악"은 당시의 사람들에게는 일종의 놀라움으로 받아들여진 것이 확실하다.    
                                        
성탄절 전야를 지낸 후 25일 새벽에는 성가대가 교인들의 집을 돌면서 "새벽송"을 하게 된다.그러니까 새벽송은 노래 종류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노래부르는 행위 자체를 말한다.부르는 노래들은 성탄절 노래들이다.교인의 집 앞에서 "고요한 밤 거룩한 밤"이나 "기쁘다 구주 오셨네"와 같은 노래들을 부르고 난 후 "성탄을 축하합니다"와 같은 말을 하게 되면 집안에서도 같은 말로 화답해 준다.어떤 집주인들은 수고했다고 다과를 제공하기도 한다.우리나라에서는 정확하게 언제부터 새벽송이 있었는지 알 수 없다.1923년 1월 17일자 기독신보를 보면[교음사료1,191],1922년도 성탄절에 관한 기사들이 나오는데,그중에서도 함경북도 성진의 교회에서 있었던 일중에 "새벽찬송대"에  관한 내용이 나온다.1924년 1월 16일자 기독신보[교음사료1,211]에는 여러 곳에서 새벽송을 했다는 기사가 나오는데,평북 의주군 관리교회,강계읍교회 ,평북 의주 서교회가 그 교회들이다.이렇게 여러 교회들이 새벽송을 했다는 것은 이것이 성탄절의 보편적 행사로 뿌리박힌 것을 의미한다.그런데 기독신보 1924년도 1월 30일자의 기사를 보면[교음사료1,213] 새벽송이 일제 치하에서 자유스럽지 못한 경우를 보고하는 글이 있다.함남 문천읍교회는 새벽송을 하다가 야순경(夜巡警)에게 검문 당한다.순경은 경찰서의 허락을 얻고 새벽송을 하는가 하고 묻는다.그러자 성가대의 청년 하나가 대답하기를 새벽송이란 조선의 모든 교회가 다 하고 구미 각국에서도 다 통례적으로 하는 것이기에 허락을 얻어 할 필요가 없다고 대답한다.순경은 자정 후에 하는 것이니 하지 말라고 말하며,계속 할 경우에 부장에게 보고하겠다고 위협한다.그러나 성가대원들은 새벽송이 세계적 통례이고,성가대가  법에 저촉되는 일을 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하고 새벽송을 계속한다.그 기사의 끝 부분은 "싀골에난 경셩보다 경관의 취톄[取締]가 심하엿다.번뜻하면 취톄이다.그래서 동리의 늙은[이]들은 저녁에 모혀안져 쟝래를 근심하기를 마지 아니 하더라"로 되어 있다.새벽송 활동자체에 대한 걱정보다 강화된 단속(취체)를 더 걱정하는 것이 그 내용이다.당시에 민족이 당했던 어려움은 교회음악활동에도 그림자를 드리웠다.   

위에서 다루어진 교회들은 군과 읍단위의 교회들인데,이 교회들이 매주일 찬양하는 성가대를 갖추었는지,아니면 성탄절에만 임시적으로 만들어진 것인지,아니면 단순히 교인들을 모아 성탄절 노래들을 단성부로 불렀는지는 알 수 없다.그러나 이 시대에 벌써 시골에도 성가대가 군과 읍단위까지 있었을 것으로 짐작한다.그 이유로는 1)평양에 성가대가 세워진 이후로 마우리 선교사와 그 부인은 시골 교회의 성가대 교육을 위해 애를 썼고 또한 그 효과도 있었다는 점,2) 박경호가 1922년 성가대의 문제점을 지적하는 말 가운데 "시골로인들이 항용 하는 말로 「요즈음 놈들은 찬미를 하여도 별하게 하더라」"라는 표현은 시골에까지 성가대가 있었다는 사실을 암시한다는 점,이 두가지를 들 수 있다.그렇다면 위의 "새벽찬송대"는 성가대원들이거나 그들이 중심이 된 것이라고 추정할 수 있다.
 

7.음악가의 배출

한국교회의 성가대는 서양음악을 모르던 많은 사람들을 음악가로 만들어 사회에 내보냈다.이는 서양음악의 사용자가 교회였다는 점에서 보면 하나도 이상스러운 일이 아니다.양악 초창기에 서양음악을 하려고 했던 사람들은 풍금소리,찬송가 소리,합창소리에 매료되었다.그들은 아주 적은 수의 예외를 제외하고는 음악가가 되는 것을 반대하는 가정·사회와 싸우면서 음악을 배웠다.음악은 점잖은 사람이 하는 것이 아니었고,좋은 가문의 자손이 하는 것이 아니었고,남자가 하는 것이 아니었다.그럼에도 기독교인 가운데에서 양악가가 많이 나온 것은 그 음악이 교회적으로 필요했다는 사실때문이었을 것이다.초기 양악가들을 살펴보면 음악을 배우기 시작할 때에 신자인 부모의 장려를 받은 사람이 없지 않은데,이들 역시 전문적 음악가가 되려고 나서면 심한 반대에 직면했다.음악가가 된 사람들 중 몇사람의 경우를 아래에서 살펴보자.

1894년 평양.이 해는 동학란이 일어난 해이기도 하고 최초의 찬송가책이 발간된 해이기도 하다.진남포 태생의 열한살의 한 소년이 평양 장로교회에 처음으로 생긴 야소교학교(후에 崇德학교가 됨)에 입학한다.그가 이 학교에 입학한 것은 삼촌의 인도에 따른 것이다.그의 삼촌은  장사하는 사람이었는데,그 해에 장사하러 나갔다가 그만 동학꾼으로 몰린다.그는 자기가 "야소교인"임을 해명하고 풀려나게 되었는데,그 이후로 그는 교회생활을 열심히 하게 된 것은 물론이고 조카인 그를 야소교학교에 입학시킨 것이다. 소년은 학교에 들어가 처음으로 마티스라는 선교사로부터 찬송가를 배운다.아직 찬송가책이 나오지 않은 시기였는지 소년은 가사를 일일이 종이에 적어가며 노래를 익힌다.소년은 목소리가 뛰어나서 다른 사람들의 칭찬을 받았다.그는 음악에 재미가 붙었다.그의 음악적 소질은 선교사에 의해 주목을 받아 선교사 개인집으로 가서 음악교육을 받게 된다.소년은 도레미파도 익히고 악보도 깨우친다.그는 숭실학교에 진학하여 음악공부를 더욱 열심히 한다.헌트 부인,미스 스눅(정의여고 교장) 등에게 특별히 음악을 배운다.소년은 삼학년 때에는 일학년 학생들을 가르치기도 한다.그는 선교사들이 가진 악보를 모조리 베꼈다.친구들 네명과 돈을 합해 선교사로부터 헌 풍금을 사게된다.네사람중 풍금공부를 계속하는 사람은 그 혼자 남게된다.그는 너무 풍금을 많이 쳐 기숙사에서 쫒겨난다.1904년 노일전쟁이 일어나자 스물한살이 된 그는 고향 진남포를 거쳐 서울로 오게된다. 서울로 온 것은 영어공부를 하여 미국으로 유학을 갈 생각에서였다.그러나 서울에 온 그는 서울에도 없는 뛰어난 음악가였다.그는 종로 중앙청년회관에서 창가선생을 시작하였고,그 이후에 여러 학교로부터 음악을 가르쳐 달라는 주문이 폭주한다.그는 미국 유학도 포기하고 창가선생으로 큰 활약을 한다.그는 1910년경에 음악가 양성기관인 조양구락부(調陽俱樂部)의 교사가 되었고 종교교회에서 모여 연습하는 경성합창대(京城合唱隊)를 만들었다.29)그는 이어서 배재고보의 교사가 되었고,정동제일교회의 성가대 지휘자가 된다.그가 바로 한국 최초의 전문적 양악가라 불리는 김인식(金仁湜,1885-1963)이다.30)

또다른 평양 사람이 있었다.그는 개화된 큰 지주의 아들로 태어났는데,그의 아버지는 일찍부터 신학문을 배웠고(숭실학교 1회 졸업생) 장대현교회의 교인이었다.그의 아들은 유아세례를 받게된,당시로서는 매우 드문 아이에 속했다.아이는 6살 되던 해에 처음으로 선교사의 집에서 풍금소리를 듣게 된다.그는 교회에서 찬송가 부르는 일에 큰 즐거움을 갖게 되었고,틈만 있으면 선교사의 집에 가 풍금을 치고 싶어했다.그러한 그의 취향을 알게 된 그의 아버지는 당시에는 엄청난 사치품이었던 풍금을 아이에게 선물한다.아이는 선교사 부인에게서 풍금을 배우는데 그의 나이 아홉살 때이었다.숭덕학교를 졸업한 아이는 이제 열여덟살의 청년이 되어 집의 돈을 몰래 가지고 일본으로 달아난다.달아난 이유는 부모의 허락이 떨어지지 않는 음악공부를 하기 위해서였다.그는 동양음악학교와 우에노(上野)음악학교에서 피아노를 배운다.1918년 그는 귀국하여 연희전문학교의 교수가 된다.그는 YMCA합창단과 교회성가대를 지도한다.그의 이름은 김영환(金永煥,1893-1978)이다.31) 

1897년 평양의 한 가난한 집안에 여자 아이가 태어난다.이 아이는 학교에 다닐 수 없을만큼 가난했으나 선교사의 도움을 받아 평양의 숭의여학교를 졸업하고 후에는 우에노(上野)음악학교를 나와 양악 초기의 흔하지 않은 소프라노 가수중 한명이 된다.그녀의 여자동생도 이화학당을 졸업하고 미국에서 성악을 공부하고 돌아와서 이화여전의 교수가 된다.이 자매의 이웃집에서는 남자 형제가 자라고 있었는데,이들은 장대현교회에 다니면서 음악에 접하게 된다.형제중 하나는 세브란스의전에서 의학공부를 하면서도 성악가의 꿈을 버리지 않고 이태리에 유학한 후 한국에 나와서 오페라 운동을 벌인다.그의 동생은 연희전문학교를 거쳐 미국에 유학한 후 한국에 돌아와 음악교수로서 여러가지 활동을 한다.자매들의 이름은 윤심덕(尹心悳),윤성덕(尹聖德)이고,형제들의 이름은 이인선(李寅善),이유선(李宥善)이다.32) 

윤심덕은 오늘날 분류로는 "유행가 가수"에 속하는데,이는 그의 『사(死)의 찬미』가 세간에 크게 유행한 탓이다.1926년에 나온 『사(死)의 찬미』음반에는 "조선유일의 쏘프라노 명가수"라고 소개되어 있고,음반의 뒷면은 유행가와는 거리가 먼 찬송가 였다.그 찬송가는 "내주 오늘 부활했네"(오늘날의 가사는 "예수 부활했으니"로 시작한다:통일찬송가 154장)의 노래이다33).이 음반의 A면은 죽음을, B면은 생명을 노래한다.하나는 유행가이고,하나는 찬송가이다.이러한 면은 원치 않게도 한국교회음악에도 상징적인 의미를 갖는다.양악의 잉태지가 교회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생명이 교회 안에서 자라지 못하고 죽음이 되어버린 일이 많기 때문이다.위에 거론된 사람 이외에도 홍난파,현재명,김세형,최동준,독고선,김동진,이흥렬,김영의(金永義),최영순(소프라노),박태준,채선엽,고봉경,이애내(피아노),안익태,조은경(피아노),백정진,계정식 등등의 수많은 양악가들은  한편으로 세속음악을,한편으로 교회음악을 했다.그러나 오늘날의 입장에서 보며는 이들의 발자취가 교회음악에서,박태준을 제외하고는,전무하다고 말할 수 있다.물론 그들이 주로 연주적으로 교회음악에 참여했기 때문에 그들의 자취를 찾기 어렵다는 사정을 감안하지 않을 수 없다.또한 그들에 관한 문헌들이 단지 일반 음악가로서의 그들을 부각시킨 신문과 잡지에 주로 실려있어서 교회에서의 활약상을 잘 알 수 없는 것도 문제점이기는 하다.그러나 지금 남아있는 결과로는 그들이 교회음악에 남긴 것들이 너무나 빈약하다는 사실에 놀라게 된다.그들은 성가대를 위해 일을 했거나 성가대를 통해서 음악가가 된 사람들이 대부분이다.그러니까 한국 교회의 성가대는 음악가 양성의 학교였던 셈이다.그러나 교회음악가 양성의 학교로는 그렇게 큰 역할을 한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  

교회 성가대원들의 대부분을 점하는 비음악가들에 관해서는 아무런 기록을 찾을 수 없다.이런 점이 성가대에 관한 연구에서 만나게 되는 큰 어려움이다. 순수한 성가대원에 머무른 대부분의 사람의 역할이나 교회에 끼친 영향이 전혀 밝혀질 수 없다.그러나 이렇게 감추어진 부분에 교회음악을 가능하게 하는 큰 힘이 있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8.끝내면서

한국교회 성가대의 출발은 1913 또는 1914년에 출발했다고 보면 한국에 기독교가 들어온지 28 또는 29년 지난 후의 일이다(여기에서 기독교 출발시점을 언더우드와 아펜셀러가 한국에 들어온 1885년으로 삼음).이는 기독교가 한국에 들어오자 마자 서양교회와 똑같은 성가대를 갖춘 것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물론 그 이전에는 특별한 행사나 절기에 임시적인 성가대가 동원된 일이 있었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다.임시적인 성가대의 역할을 자주 담당했던 것은 기독교 학교의 학생들이었다.그들중 음악에 소질있는 학생들은 전도단을 구성하여 전국적으로 순회하면서 활동하기도 했다.초창기에는 서양음악이라는 것 하나만으로도 일반인들을 주목시켜 전도하는 일에 도움이 되었던 것이다.이렇게 전도와 가까운 음악활동은 한국 초기교회의 특징이기도 했다.평양의 장대현교회가 청년운동의 일환으로 성가대를 발족시켰던 것도 그렇고,새문안교회 성가대가 시흥교회의 전도집회에 초청받은 일도 음악과 선교의 면이 함께 생각된 것을 알 수 있게 한다.이런 면은 오늘날 성가대가 예배에서의 역할과만 관련해서 생각되는 것과는 큰 차이를 보인다.

교회중에서 성가대의 육성에 열심인 교회는 평양 장대현교회와 서울 정동제일교회였는데,이 교회들 이외에도 성가대로 유명한 교회가 없지 않으나 문헌의 부족으로 추적할 수가 없었다.앞의 두 교회는 나름대로 한국의 교회음악에서 특별한 기여를 한 것으로 판단된다.또한 1920년대에는 매우 서툴고 부족하나마 군과 읍 단위의 시골에까지 성가대가 있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성가대가 교회와 사회에 끼친 영향은 결코 적지 않다.특히 한국교회의 초기에는 현재보다 그 영향이 더욱 컸다고 말할 수 있다.이러한 교회 성가대의 역할이 서양음악의 유입과만 관련되어서 이야기 되고,교회의 음악사로서 논의되는 일은 오히려 더 드물다.이러한 현상은 교회가 자체의 역사를 돌보지 않기 때문에 나타나는 현상이다.특히 한국 교회의 음악사는 연구가 매우 미진한 수준에 머물러 있다.더욱 자세하고 정확한 연구작업이 이루져야 한다.   

참고문헌

[교음사료1]:한국교회음악 사료집1(홍정수 편찬),장로회신학대학 교회음악연구소 1992.
[교음사료2]:한국교회음악 사료집2(홍정수 편찬),장로회신학대학 교회음악연구소 1993.
길진경:靈溪 吉善宙,종로서적,1980.
김세형:韓國에서 西洋音樂의 藝術化發展과 마우리 博士↗예술원보 제11호,1972
새문안교회 문헌 사료집 제1집,새문안교회 역사 편찬위원회 1987.
신금선:이화음악 100년을 돌아보며↗이화음악 제10호,이화여자대학교 음악대학 1986.
여명의노래 1910-1945(CD음반 명인명창선집 3) 1991.
이만열 편저:아펜젤러,연세대학교 출판부 1985.
이유선:한국양악100년사,음악춘추사 1985
이중태 ,한국교회음악사,예찬사 1992
장사훈:여명의 양악계,세광출판사 1991
정동제일교회 90년사.정동제일교회 1977

각주
1.이만열 편저:아펜젤러,연세대학교 출판부,1985,299쪽.
2.신금선:이화음악 100년을 돌아보며↗이화음악 제10호,이화여자대학교 음악대학 1986,10쪽.  
3.길진경:靈溪 吉善宙,종로서적,1980,218쪽.
4.마우리는 1909년 평양 숭실학교의 생물학과 영어 선생으로 부임했다.
5.길진경 1980,p.220ff.
6.어떤 문헌은 이 장대현교회 성가대가 1909년에 시작했다고 되어 있다(예:이중태 ,한국교회음악사,예찬사 1992,31쪽).그러나 이는 마우리 선교사가 한국에 온 해를 성가대의 시작 시기와 동일시 하는 데서 오는 착오로 여겨진다.
7.길진경 220쪽.
8.당시 주일 대예배는 오후 2시에 있었다.길진경 115쪽.
9.길진경 115쪽.
10.김세형:韓國에서 西洋音樂의 藝術化發展과 마우라 博士↗예술원보 제11호,1972,17쪽.
11.길진경.220.
12.길진경.103.
13.길진경.220.
14.길진경.221.
15.길진경.222.
16.박경호는 1932-37년까지 이화여자전문학교에서 음악이론을 가르쳤고,41년 이후에는 경성음악전문학원에서 피아노와 작곡을 가르치며 경성교향관현악단을 지휘했다.그의 비극은 음악가중 가장 친일적인 논조로 일제의 기관지인 매일신보에 글을 쓴 일이다. 
17.교가가 실린 학교들을 다음과 같다:송도고등보통학교,정신여학교,숭실학교,신성학교,계성학교,경신학교,숭의학교.
18.영어로 "Moonpal island"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그 정확한 한국어 명칭을 찾을 수 없었다.
19.김세형,18쪽.
20.[교음사료1.2.27]
21."車載明氏가 口頭로 報告하기를 始興郡에 傳道하난 事에 對하야 敎友 二百人 假量이 集會하야 禮拜 보난대 讚美隊를 派遣하고자 請求함매..."새문안교회 문헌 사료집 제1집,새문안교회 역사 편찬위원회 1987,339쪽.   
22.정동제일교회 90년사.정동제일교회 1977.
23.정동제일교회90년사.189-188쪽.
24.新風景의 禮拜堂↗新生 1929.9.20-21.[교음사료2.173-174]
25.기독신보 1918.8.21.[교음사료1,157]
26.정동제일교회90년사.190-191쪽.
27.정동제일교회 90년사 281쪽.
28.그리스도 신문 1902.2.27.[교음사료1,64]
29.이유선:한국양악100년사,음악춘추사 1985.113-114쪽.
30.김인식에 관한 이야기는 두개의 원전을 참조하여 서술한 것이다.1)김인식:소리 안나는 코넷 연주↗윌간 『中央』1934,6월호(이 글은 장사훈,71-73쪽에도 실려있다),2)신문기사 「찬송가가 시초되여 도레미파를 학습」↗每日新報 1936년 1.22.
31.김영환에 관한 이야기는 두개의 원전을 참조하여 만든 것이다:1)김영환:남기고 싶은 이야기↗중앙일보 1974.4.19ff.(이 글의 상당 부분이 이유선 1985,120-134쪽에 실려 있다) 2)김영환:피아노광 시대와 하숙생활↗월간 『中央』1934년 6월호(이 글은 장사훈 1991, 75.-77쪽에도 실려있다)
32.이 부분은 이유선 1985,133쪽 참조.
33.여명의노래 1910-1945의 해설집,1991,30-3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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