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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파이 [Dufay, Guillau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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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파이 (Guillaume Dufay 또는 du Fay 또는 Du Fayt,  1400 년경(1397?)-  27.11.1474, 캉브레), 


프랑스의 작곡가. 당대에는 음악가에 대한 문헌이 소상하지 못한 점이 있어서, 그의 생애에 대한 내용은 상당 부분 추측에 의존하여 재구성된다. 그는 교회의 사제이자 음악가로 활동했는데, 사제보다는 음악가로서 더 많은 비중을 가졌던 것으로 판단된다. 이는 그의 묘비명에 나오는 첫 명칭이 Musicus(음악가)인 것으로 그러하다.  
뒤파이는 캉브레 주교 성당에서 최초의 교육을 받았다. 
뒤파이는 1420년에서 26년 사이에 당시 카톨릭 교회의 실력자이자 예술 애호가였던 말라테스타(Malatesta) 가문과 밀접한 연관성을 갖고 작품활동을 하였다. 그는 고향에서 성직을 맡아 지내면서 가끔 말라테스타 가문을 위해서 일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1427년 뒤파이는 볼로냐로 갔는데, 그때 그는 아직 부제의 신분이었다. 그는 다음 해인 1428년에 볼로냐에서 사제가 되었다. 그 해에 그는 교황마르티누스 5세 교회에서 성악가가 되었다. 교황청의 일원이라는 것은 그에게 로잔느 교회의 참사원이 되는 특권을  주었다. 

그는 1433년 8월에 로마를 떠났다고 추정되지만, 어떤 원전은 1434년 2월 1일에서야 비로소 사보이 가문의 아메데 8세를 위해 일하는 것으로 보고한다. 그는 1435년에 아메데 교회의 악장이 되었다.  이 기간에 그는 베르수아(Versoye)에서 주임신부로 일했다.  1435년 6월부터 1437년 5월까지  교황교회의 직무를 맡아, 플로렌스와 볼로냐에서 일했다. 유진 4세 궁정의 일원이자 가수로서 그는 캉브레 대성당의 참사원이 되었다. 교황교회의 직무를 마친 후에 그는 페라라의 니콜라우스 3세에게 갔다. 

다음 해에 사보이 가문과의 교류는 다시 활발하게 되었다. 1438년 5월 사보이 가문의 루드비히가 프라이부르크와 베른에 가서 두 도시의  평화조약을 축하했는데, 이 때에 작곡된  모테트 "용감한 사람들"(Magnanimae gentis)은 뒤파이가 사보이 가문과 함께 일했다는 것을 증거한다. 이 시기 이후 7년간 그는 사보이 궁정에서 체류했다. 
1439년에 그는 브뤼거에 있는 성 도나티엔 교회로부터 성직을 받았다. 1446년 몽스에 있는 성 위드루 교회의 자문위원이 되었다. 자문위원직에 관한 문서에서 그는 교회법의 바칼라우레우스(Baccalaureus)와  부르고뉴 공작 교회의 사제라는 칭호로 불린 것을 알 수 있다. 이는 그가 교회법 전문가였고, 부르고뉴 공작 가문과 가까 관계인 것을 드러낸다. 그는 부르고뉴의 공작 필립과 여러 번 만났었다(디종, 브뤼셀, 헤네가우). 1451년부터 뒤파이는 고향 캉브레에 살았고 여행을 자주 하였다. 
그의 작품, 특히 여러 행사를 위한  모테트들은 그의 음악적 중요성을 증거한다. 또한 플로렌스 메디치가의 오르가니스트 스쿠아르치아루피(Squarcialupi)가 1467년 뒤파이에게 보낸 편지 등도 그의 음악적 역량을 알려준다.

뒤파이의 명성은 이 시기에 유럽에 널리 알려져 있었다. 반면에 그가 죽고 나서는 한참 동안 그에 관한 언급들이 나타나지 않았다. 19세기 이후의 음악학자들은 그를 재발굴하여, 15세기 음악사의  중요인물로 부각시켰다.
거의 이태리에서 필사본으로 전해오는 그의 작품들은 200여개에 달한다. 이것들은 미사와 미사곡의 부분들, 마니피카트, 라틴어 모테트 (종교적 그리고 세속적), 안티폰, 프랑스 샹송(발라드 와 론도), 이태리어 발라타와 칸쪼네로 되어 있다.

뒤파이는  15세기 중엽의 음악양식의 변화에 깊게 관여했다. 그와 함께 이른바 "네델란드 악파"가 시작되었다. 15세기 당시에는 네델란드라는 나라가 없었기에 당시의 국가 명칭 중의 하나인 부르고뉴 악파로 분류되기도 한다. 그런데 부르고뉴는 1577년에 이미 없어졌고, 이들이 작곡에 사용한 언어도 프랑스어와  자신들의 현지 언어인 플랑드르 말 로 작곡했기에 "프랑코 플랑드르 악파"로 불리기도 한다. 하지만 뒤파이는 플랑드르가 아니라, 북프랑스 사람이었다. 뒤파이의 음악적 업적 중 가장 큰 것은 영국, 프랑스, 이태리의 음악을 묶어 유럽적 예술음악 전통을 시작한 것이다. 그는 아르스 노바의 모테트 스타일인 동질서리듬을 사용하기도 했지만, 그 구조로부터 벗어나 모든 성부가 동등한 대위법적 작품을 목표로 하는, 일관모방양식을 준비했다. 이 양식은 오케겜, 오브레흐트를 지나, 조스깽에서 그 절정을 이룬다. 하지만 이 흐름은 랏소와 팔레스트리나까지 이어지는 것으로 보아야 타당하다.
뒤파이 음악의 시작은 마쇼의 -그 핵심은 2성부인- 3성부 프랑스어 샹송, 그리고 동질서리듬적인 모테트(주로 4성부)였다. 근 처음에 미사의 부분곡들도 프랑스식 3성부 샹송식으로 작곡하였다. 하지만 나중의 4성부 미사연곡은 영국의 모델을 따라 모든 곡에 같은 고정선율(cantus firmus)을 사용하는 것이었다. 榴?포부르동을 최초로 자신의 음악에 사용한 사람으로 평가받기도 했다. 즉 그의 {성 야곱 미사}(Missa Sancti Jacobi, 1427)에 나타나는 음향이 포부르동을 적용한 화음이라고 평가된 것이다. 하지만 이는 영국식 음악을 빌려온 것으로 "최초"의 것으로 보는 것은 무리라는 번대견해를 불러왔다. 또한 최저음이 1도, 5도, 1도로 진행하는 것도 화성의 근본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첨가된 성부에 지나지 않는다고 보는 견해가 우세하다. 그럼에도 그의 음악은 모든 성부를 고려하는 "작곡적 전체"를 항상 생각하는 사고로 한발 더 다가섰다는 데에는 이견이 없다.

등록일자: 2004-12-11
장동욱/홍정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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