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랏소 [Lasso, Orlando d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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랏소(Orlando di Lasso, 1532경 몽스 ‘Mons’ - 1594.6.14 뮌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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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코 플랑드르 악파의 작곡가. 흔히 팔레스트리나와 함께 16세기의 가장 뛰어난 음악가 중 한 사람으로 꼽힌다. 그는 프랑스 태생이며, 이태리에서 음악 교육을 받았고, 거의 40년 동안을 독일 뮌헨에 있는 바이에른 궁정에서 보냈다. 그의 수많은 작품은 성악곡에 집중되었다. 라틴어로 된 교회음악, 이태리어로 된 마드리갈, 프랑스 샹송, 독일어 노래 등이 그것인데, 이러한 성악 작품들 속에 그의 국제성이 반영되었다. 

[소년 성가대원] 8세의 랏소는 처음에 몽스(Mons)의 성 니콜라스 교회 소년 합창단원 이었다. 랏소의 최초 전기 작가인 크비켈베르크(Samuel Quickelberg)에 의하면, 랏소는 좋은 목소리 때문에 몇 번 납치당했다고 한다. 12살이 된 랏소는 그 이후에 시실리의 부왕 곤차가(Ferdinando Gonzaga)를 따라 프랑스를 경유하여  만토바(Mantova)와 팔레르모(Palermo)로 옮겨갔고, 마지막으로는 밀라노에 머물렀다(1546). 밀라노에서 18세가 될 때(1549)까지 랏소는 곤차가를 섬겼다. 그 후 곤차가는 앗소를 황제에게 충성하던 기사 카스트리오토(Costantino Castrioto)에게 맡겼고, 랏소는 그를 따라 나폴리로 갔지만 그를 섬기지는 않았다.  

[나폴리] 나폴리에서 랏소는 음악가로서 약 3년 동안 후작 다찌아 델라 테르짜(G. B. d´Azzia della Terza)궁정에서 살았는데, 그 곳에서 휴머니즘적 교육을 받은 귀족들과 사귀었다. 특히 이곳에서 빌라넬라, 모레스카 등 사투리로 부르는 민속음악을 알게 되는데  랏소는 자주 이러한 표현 방식을 사용했다. 이때에 이미 랏소의 명성은 로마 라테라노( Laterano)에 있는 성 지오반니 교회 악장(1553)으로 임명 될 만큼 높았다. 그러나 그 이듬해 랏소는 악장 직에서 물러났다. 팔레스트리나가 1555년 10월 성 지오반니 교회 악장이 되었으므로 랏소는 팔레스트리나의 바로 전임 악장이 되는 셈이었다. 당시 두 사람이 서로 알고 지냈는지에 대해서는 알려지지 않았다. 

[뮌헨] 1556년 랏소는 바이에른의 공작 알브레히트(Albrecht) 5세의 부름을 받아 뮌헨 궁정악대의 테너 가수로 들어갔다. 그 곳에서 궁정악장이 된 것은 늦어도 1564년이다. 랏소는 사망할 때까지 악장의 지위에 있었다. 1580년 랏소는 드레스덴 궁정악장으로 부름을 받았으나, 그의 나이와 뮌헨 거주 등의 이유를 들어 거절하였다(1580). 그는 우울증으로 인하여 불행한 만년을 보냈다. 사람들은 그것이 정신적 혹사 때문이라고 보았다. 그의 부인 레기나(Regina)가 남긴 문서에 의하면 랏소는 뇌졸증으로 사망하였다고 한다. 

[악보출판] 1555/56년 랏소는 앤트워프에서 약 2년 동안 지냈는데 여기에서 최초의 모테트 모음집들이 수사토(Susato)에 의해 출판 되었다. 이 출판의 중요성은 전적으로 랏소의 작품만으로 구성된 개인 출간집이라는 사실이라는 데에 있다. 이 출판은 그의 작품을 국제적으로 널리 알리는 시작이 되었다.『뉘른베르크 모테트 선집』(1568, 1579)과 화려한 뮌헨의 랏소 출판집인『수호성인 축일음악』(1573-76), 그리고 사후에 두 아들에 의해 편찬된 516곡의『대 음악 작품집』(1604)은 작품 출판의 절정을 이루는 것들이다. 

[여행] 랏소는 거의 40년 동안을 바이에른 궁정에 매인 몸이었지만  외교적으로나 또는 예술적으로 큰 의미를 가진 많은 여행(이탈리아, 프랑스, 비엔나, 영국 등)을 통해 유럽의 여러 궁정과 밀접한 관계를 맺었다. 그는 1560년부터 프랑스 국왕으로부터 연금을 받았고, 1575년에는 프랑스 국왕 앙리 3세로부터 악보 출판의 특권을 받았다. 

[제자들] 그의 제자들 중에는  렉흐너(L. Lechner), 에카르트(J. Eccard), 아이힝어(Gr. Aichinger), 지오반니 가브리엘리(G. Gabrieli)가 있다. 랏소는 1558년 결혼하여 두 아들을 두었는데, 이들은 페르디난드(Ferdinand, † 1609)와 루돌프(Rudolph, †1625)였다. 두 아들 모두 뛰어난 음악가가 되었다. 페르디난드는 호엔촐레른 가문 의 백작 프리드리히(Eitel Friedrich)의 악장(1585)이 되었고, 루돌프는 오르가니스트(1586)가 되었다. 

[명성] 랏소는 아마도 16세기에 가장 많은 양의 작품을 남긴 작곡가일 것이다. 그의 작품은 2000곡을 넘는다. 그는 또한 르네상스 음악이 제공하는 모든 기법들을 총괄하는 높은 질의 음악을 남겼다. 그가 생존해 있던 당시 그의 명성은 대단하였다.  그의 동시대 사람들도 여러 차례 랏소를 모든 음악가들보다 높이 평가하였고 그를 자주 “벨기에의 오르페오”(belgischer Orpheus)라 불렀고, 그의 작품집의 표제에는”음악가의 왕” (Fürst der Musiker)또는 “신 같은 오를란도”(göttlicher Orlando) 라고 명명되었다. 

[교회음악]  반종교 개혁을 지지했던  랏소는 뮌헨 궁정 악장으로서 예배를 위하여 미사곡(70곡이상, 이중에 3곡은 레퀴엠), 수난곡(4곡), 모테트(약 700곡), 마니피카트(101곡) , 힘누스(32곡), 참회의 시편가(7곡), 베네딕투스(4곡), 눙크 디미티스(14곡) 및 리타니아(16곡) 와 성무일과 음악 등을 작곡하였다. 

[미사곡] 랏소는 70곡 이상의 미사를 작곡했음에도 불구하고 팔레스트리나에 비교할 만한 무게를 가진 작품을 남기지 못했다. 그의 미사는 그레고리오 성가에 기초한 미사가 있으나 상당수가 패로디 미사이다. 이것은 자신의 곡 또는 다른 작곡가들의 샹송, 마드리갈, 모테트 등을 인용하거나 암시적인 패로디 기법을 사용하고 있다.  로마의 성 지오반니 교회 악장 시기에 랏소는 공베르(Nicolas Gombert) 양식의 미사를 다수 작곡하였다. 옛 양식을 답습한 그의 미사곡들은 높은 수준을 보여준다고 보기는 어렵다. 

[모테트] 그의 능력은 모테트에서 드러난다. 이들 모테트들은 2성부에서 12성부까지 다양한 형태로  작곡 되었을 뿐 아니라  가사도 라틴어, 독일어를 작품에 따라 사용하고 있다. 음악 양식도 다양하다. 초기 모테트에서는 프랑코 플랑드르 양식과 16세기 이태리 양식의 조합을 보여준다.  카논기법이나 오스티나토 기법을 사용한 모테트도 있으며  몇몇 모테트에서는 소제토 카바토 기법이나 정선율을 사용한 모테트도 있다. 그의 정선율을 사용한 4-6성부 모테트들은 네덜란드적이고 독일적인 코랄모테트의 전통을 수용하였다. 모테트 분야에서 랏소가 누리는 특별성은 고정선율을 갖지 않는, 또는 고정선율과 연관성이 덜한 모테트 분야에 있다. 이런 형식의 모테트를 소위 찬송가 모테트(Liedmotette)라 하였다. 이러한 독일(어) 찬송가모테트는 그의 제자들인 렉흐너와 엑카르트에 의해서도 창작되었는데, 랏소는 이들에게 영향을 주었다. 
가장 전형적인 모테트는 5성부 모테트인데 「슬프도다 내 영혼이여」(Tristis est anima mea) 그리고「그리스도여 당신을 찬양 합니다」(Adoramus te Christe)는 그의 대표작이다. 6성부 모테트 중에는「두려움과 떨림」(Timor et tremor)이 뛰어난 작품이다. 또한 『다윗의 참회의 시편가』(Psalmi Davidis poentitentiales)도 있다. 이 작품에는 당시에 알려진 성악기법들이 종합되어 단순한 멜로디, 풍요한 음향과 빈약한 음향의 대조, 잘 짜여진 리듬의 변화, 대위법적 완벽성 등을 볼 수 있다. 7개의 시편을 바탕으로 연곡으로 만든 이 참회의 시편가는 랏소 음악의 절정일 뿐만 아니라, 당대의 성악곡 중의 절정으로 보아도 큰 무리가 없다. 

[세속음악] 팔레스트리나가 거의 교회음악작품을 남긴 반면 라소는 교회음악뿐 아니라 세속음악에서도  뛰어난 작품을 남겼다. 당시 여러 나라 언어에 능통하였던 랏소는 프랑스 샹송, 이태리 마드리갈, 독일 노래 등 모든 장르에 작품을 남겼고, 음악적으로도 또한 각 민족의 양식을 정확히 파악하고 있다. 이러한 그의 능숙함은 이미 최초의 모음집인『마드리갈, 빌라넬라, 칸쪼나 프란체제, 모테트 모음집 제1권』(앤드워프 1555)에서 잘 나타난다. 그의 세속 작품은 이태리 마드리갈(200곡 이상), 모레스카, 빌라넬라, 프랑스 샹송(146곡), 독일 노래(93곡), 라틴어로 된 행사음악, 헌정 작품 등이다. 

[마드리갈] 특히 랏소의 페트라르카(Francesco Petrarca)와 아리오스토(Ludovico Ariosto)의 가사로 된 5성 마드리갈은 양적으로나 작품의 내용에 있어서도 그의 세속작품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마드리갈에 있어서 랏소는 운율법이 아니라 가사가 갖는 갖가지 동기를 사용하여 작곡하고 있으며, 가사의 내용을 그대로 음악으로 표현하려 하고 있다. 
그의 마드리갈은 로레(Cipriano de Rore)의 영향을 받아 무거운 성격을 가지는 것이 대부분인데 「잔혹하고 괴롭고 무정한 죽음」(Crudel, acerba, inesorabili morte)이 그 경우이다. 만년에 랏소는 1580년경 크게 유행했던 목가적인 마드리갈을 무시하고 종교적 마드리갈로 관심을 돌렸다. 루이지 탄실로(Luigi Tansillo)의 종교적 가사로 이루어진 모음집 『베드로의 눈물』은 교황 클레멘스(Clemens) 8세를 위해 작곡된 종교적 마드리갈(20곡)이다. 

[샹송] 랏소의 등장과 더불어 샹송은 그 장르 자체가 갖는 다양한 성격뿐만 아니라 마드리갈의 여러 요소도 통합한 음악으로 만들어졌다. 그러한 작품으로는 4성의 것 외에 5성부 또는 6, 8성부의 것도 있다. 랏소는 항상 가사와 음악의 연관성에 마음을 썼고, 똑같은 리듬을 가진 음악의 소단위나 모방에 의한 짧은 악구를 즐겨 사용했다. 그는 알랭 샤르티에(Alain Chartier), 프랑수와 비용 (François Villon)등의 시를 즐겨 사용했다.  
랏소의 프랑스 샹송에서는 여러 가지 영향이 함께 나타난다. 즉 크렉키용(Thomas Crecquillon,  † 1557), 클레멘스 논 파파(Clemens on Papa, † 1555/56), 이태리 동시대 작곡가들의 영향이 그의 작품에서 나타난다.  콘트라팍툼을 포함하는 랏소의 샹송 대 모음집은 그의 작품의 인기를 반영한다. 그 모음집은 1576년『음악의 보물』이라는 제목으로 출판되었다. 

[독일노래] 랏소가 1557년 뮌헨에 간 이후 독일어 작곡에도 힘을 썼다. 1567년부터 1570년까지의 기간에그는 6개의 모음집 (3성부에서 6성부까지)을 출판 하였다. 최초의 독일 노래 모음집은 『5성부 새 독일 노래』(1567)이다. 노래 가사는 아마도 독일 노래를 수집하던 알브레히트 공작으로부터 받았을 것으로 생각된다. 궁중생활의 흥을 돋우기 위하여 대부분 노골적이거나 또는 유머가 있고, 자주 사랑이나 술에 관한 내용이 다루어졌다. 종교적 독일노래는(루터의 종교적 노래와 같은) 특별한 부류를 만들어 냈는데, 그것은「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Vater unser im Himmelreich) 또는 모음집 『독일어 시편』(1588)이다. 

[랏소의 음악 특징] 랏소의 음악을 팔레스트리나의 것과 비교해 본다면, 랏소는 감정적 표현에서 직접적이고, 리듬적인 것이 더 강한 요소로 나타난다. 그는 전통적인 고정선율기법, 네덜란드의 모방음악, 베니스 악파의 이중합창, 이태리의 민속음악 등을 흡수하여 자신의 음악에 사용했다. 화성 면에서는 주요 3화음이 지배적이어서, 부3화음이 많은 팔레스트리나의 음악에 비해 화성적인 면에서 더 근대적으로 들린다(이 두 사람은 르네상스 후기의 대표적 작곡가이며, 이들의 음악은 대위법에 의한 성악 폴리포니의 전형으로 여겨진다). 무엇보다도 랏소의 음악은 풍성한 소리를 지향하여 악기들의 사용이 많다. 가사 내용의 관점에서 보면, 랏소는 언어를 음악적으로 상징화하고, 묘사적으로 음악을 구성시키는 경향이 뚜렷하며 가사의 ‘감정적 내용표현’에 주력하였다. 또한 그는 언어의 억양을 우선하였으며, 멜리스마를 매우 절제하여 사용하였다. 

주요작품(집) 

교회음악 

미사곡 
『주는 나를 따라』(Domine secundum actum meum), 5성부 (1570) 
『슬픔의 노래여 가라』(Ite rime dolenti), 5성부 (1574) 
『고통으로부터의 해방』(Scarco di doglia),5성부 (1574) 
『달콤한 추억』(Doulce memoire), 4성부 (1577-78) 
『축일미사』(Missa de feria), 4성부 (1577-78) 
『죽은 자를 위한 미사』(Missae pro defunctis), 5성부 (1589) 
『요셉은 말했다』(Dixit Joseph), 6성부 (1607) 
『보라 지금 주의 은혜를』(Ecce nunc benedicite Dominum), 6성부 (1610) 

모테트 
『5-6성부 모테트 모음집』(Il primo libro de mottetti) (1556) 
『모테트 선집』(Selectissimae cantiones ...)4,5,6성부(뉘른베르크 1568) 
『모테트 선집』(Selectissimae cantiones ...) 4,5성부 (뉘른베르크 1568) 
『모테트 선집』(Altera pars selectissimarum cantionum...), 4,5성부(뉘른베르크 1579) 
『6성부 모테트 모음집』(Motetta sex vocum)(1582) 
『예레미아 애가와 속죄의 노래』(Hieremiae prophetae...... ),9곡 수록(1585) 
『대 음악 작품집』(Magnum opus musicum), 516곡 수록 (1604) 

그 밖의 교회음악 
『거룩한 노래 25곡』(25 Sacrae cantiones...), 5성부 (1562) 
『5성부 거룩한 노래 』(Sacrae cantiones sex vocum), 5성부 (1594) 
『수호성인 축일 음악 제1권』(Patrocinium musices...)(1573) 
『수호성인 축일 음악 제2권』 (Patrocinium musices ....), 5성부 (1574) 
『수호성인 축일 음악 제3권』(Patrocinium musices ....), (1574) 
『수호성인 축일 음악 제4권』(Patrocinium musices ....), (1575) 
『수호성인 축일 음악 제5권』(Patrocinium musices ....), (1576) 
『마태 수난곡』(Passio Domini nostri Jesu ..... Mattheum), 5성부 (1575) 
『욥기에 의한 9개의 렉티오』(Sacrae lectiones ex propheta Job), 4성부 (1565) 
『욥기에 의한 9개의 렉티오』(Lectiones sacrae novem ex libris Hiob), 4성부 (1582) 
『독일어 시편』(Teutsche Psalmen mit dreyen Stimmen), 3성부 (1588) 
『다윗의 참회의 시편』(Psalmi Davidis poentiales), 7곡 수록 (1584) 
『성 베드로의 눈물』(Lagrime di San Pietro.... ), 7성부(1595) 

세속음악 
『시빌라의 예언』(Prophetiae Sibyllarum), 4성부 (1600) 
『비치니움 12곡』(12 Bicinien)(1577) 

마드리갈 
『5성부 마드리갈 집 제1권』(Il primo libro di madrigali)(1555) 
『5성부 마드리갈 집 제2권』(Secondo libro delle muse)(1557) 
『5성부 마드리갈 집 제3권』(Il terzo libro delli madrigali)(1563) 
『4성부 마드리갈 집 제1권』(Il primo libro di madrigali)(1560) 
『빌라넬라 모레스카 그 밖의 곡』(Libro de villanelle, moresche et..)4,5,6,8성부(1581) 
『새 마드리갈 집』(Madrigali novamente composti), 5성부 (1585) 
 『마드리갈 집』(Madrigali a quattro, cinque et sei voci), 4,5,7성부 (1587) 

샹송 
『마드리갈, 빌라넬라, 칸쪼나 프란체제, 모테트 모음집 제1권』4성부, (앤드워프 1555) 
『샹송 곡 집 제3권』(Tiers livre des chansons......), 6성부(1560) 
『샹송 곡 집 제1권(Le premier livre de chansons.... ), 4성부 (1564) 
『샹송 곡 집 제 4권 (Quatriesme livre des chansons.....), 4, 5성부 (1564) 
『새 샹송곡집』(Livre de chansons nouvelles ....)(1571) 
『음악의 보물』(Thrésor de musique...contenant ses chansons)(1576) 

독일노래 
『 5성부 새 독일 노래』(Newe teütsche Liedlein), (1567) 
『독일 노래 제2집』(Der ander Theil teutscher Lieder), 5성부 (1572) 
『아름다운 새 독일 노래 제3집』(Der dritte Theil schöner...... Lieder) 5성?1576) 
『종교적 세속적 소곡집』(Etliche ......geistliche und weltliche Liedlein), 4성부 (1582) 
『종교적 세속적 새 독일노래집』(Neuwe teutsche Lieder), 4성부 (1583) 
『5성부 독일 노래집』(Teutsche Lieder mit fünff Stimmen)(1583) 
『독일과 프랑스의 새 노래』(Neuwe teutsche.... frantzösiche Gesäng), 6성부(1590) 


전집(GA), 출판: Fr. X. Haberl / A. Sandberger, 총21권., Leipzig 1894-1927 
전집(Sämtliche Werke, Neue Reihe), 출판:  Académie Royale de Belgique /. Bayerische Akademie der Wissenschaften,  총26권, Kassel 1956-1996. 

[참고문헌] 
W. Boetticher: Orlando di Lasso und seine Zeit, 1958 
H. Leuchtmann: Orlando di Lasso. Sein Leben, 1976 
Fr. Messmer : Ein Leben in der Renaissance. Orlando di Lasso. Musik zwischen Mittelalter und Neuzeit, München 1982 
J. Erb: O. di Lasso. A Guide to Research, = Garland Composer Resource Manuals XXV, New York 1990. 

장동욱


작곡(가)사전 한독음악학회


랏소, 오를란도 디(Lasso[Lassus], Orlando di, 1532경-1594)

- 1532년경 현재의 벨기에 영토인 에노 지방의 몽스(Mons in Hennegau)에서 출생. 
- 소년시절부터 몽스의 성 니콜라스 성당(St. Nicholas)의 소년성가대원으로 활동.
- 1544년 곤차가(St. von Ferdinand Gonzaga, 1545년 시칠리아의 부왕에 임명됨)에게 발탁되어, 그와 함께 1547-1549년 사이에 프랑스를 거쳐 만토바, 밀라노, 시칠리아 등을 돌며 연주여행을 함. 
- 1550년경부터 나폴리에 정착하였고 곤차가와 함께 팔레르모(Palermo) 등을 여행함.
-1553-1554년 로마의 산 조반니 디 라테라노 성당(St. Giovanni di Laterano)의 악장으로 활동함.
- 1555년 공직을 맡지 않은 채 안트베르펜(Antwerpen)에 잠시 머무름.
- 1556년 신성로마제국의 바이에른 지역 뮌헨의 공작 알브레히트 5세(Albrecht V)의 궁정악단의 테너 가수로 들어감. 
- 1558년 바이에른 궁정 관리의 딸 베킹거(R. Wäckinger)와 결혼함.
- 1563년부터 알브레히트 5세 궁정의 악장으로 임명되어 죽을 때까지 봉사함. 
- 1570년 황제 막시밀리안 2세(Maximilian II)에 의하여 귀족으로 신분이 상승됨.
- 1574년 교황 그레고리우스 13세(Gregorius XIII)로부터 황금박차훈장의 기사(Ritter vom Goldenen Sporn) 작위를 받음. 
- 1580년 이후에는 궁정의 관직을 벗고 교회음악 작곡에 전념함. 
- 1594년 6월 14일 뮌헨에서 사망.

  랏소의 작품 경향과 업적은 다음과 같이 세 가지로 요약될 수 있다. 국제적 감각의 다양성, 교회음악과 세속음악을 망라하는 포괄성, 모테트의 완성자로서의 의미가 그것이다.
  첫째 랏소의 작품들은 그의 국제적 감각의 다양성을 보여준다. 
  랏소는 흔히 프랑코 플랑드르 악파의 대미를 장식한 작곡가로 평가된다. 이 악파는 플랑드르 악파라고도 하는데 플랑드르가 한 때 네덜란드의 남부에서 프랑스의 북동부 일대를 일컫는 지역이라 하여 네덜란드 악파라는 이름으로도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이 악파의 인물들이 주로 벨기에 남부와 북부 프랑스를 중심으로 활동하였기 때문에 프랑코 플랑드르 악파라는 이름으로 부르는 것이 일반적이다. 이 악파는 오케겜(J. Ockeghem), 오브레히트(J. Obrecht), 조스캥(Josquin) 등의 대가들을 거쳐 16세기에 랏소가 그 대미를 장식한다. 이 악파의 영향은 전 유럽에 걸쳐 있었고, 모테트를 비롯하여 미사 등의 교회음악과 샹송, 마드리갈, 리트 등의 일반(세속)음악까지 망라하여 성악음악의 발전에 크게 기여하였다.
  랏소는 한 나라에 머물지 않고 16세기 유럽 전역을 여행하며 여러 나라의 음악들을 섭렵하여 자신의 음악에 적용한 국제적인 인물이고, 따라서 그의 음악은 다양성을 특징으로 하고 있다. ‘올란드 산악지대 출신’이라는 뜻의 그의 이름도 ‘Orlando di Lasso’라는 이탈리아식 외에 라틴식의 ‘Orlandus Lassus’, 프랑스식의 ‘Roland de Lassus’, ‘Orlande de Lassus’ 등 다양한 표기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랏소 스스로가 이탈리아식 이름(Orlando di Lasso)을 즐겨 썼기 때문에 대부분 이것을 표준으로 하여 그의 이름을 표기하고 있다.
  랏소의 어린 시절은 팔레스트리나(G. P. da Palestrina)처럼 베일에 가려있다. 그의 출생연도도 가장 최근의 연구결과에 의하여 1532년이라고 확정되었지만 1530년 혹은 1520년 등 여러 설도 있다. 랏소는 타고난 미성을 지녔으며, 어린 시절부터 몽스의 성 니콜라스(S. Nicolas) 교회당의 소년성가대원으로 활약하였다. 후에 그는 프랑스를 거쳐서 시칠리아, 나폴리, 밀라노 등 여러 곳으로 연주여행을 하면서 다양한 나라의 음악을 접할 수 있었다. 그의 미성 때문에 인근 지역의 합창단에게 세 번이나 납치를 당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마치 모차르트가 그랬듯이 이러한 경험은 그의 음악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랏소는 12세에 이탈리아에 가서 10년 동안 살았고 이탈리아 음악을 체질화시켰다. 12세(1544년)가 되던 해에 그의 아름다운 음성에 반한 곤차가에게 발탁되어 프랑스를 거쳐 만토바, 밀라노, 시칠리아 등을 돌며 여행을 하게 되었는데, 이때 이탈리아의 여러 음악과 축제 등을 경험하였다. 랏소는 1550년경부터 시칠리아의 부왕인 곤차가의 인도로 나폴리에서 살게 되는데, 이때 시인 다치아 델라 테르차(G.-B. d’Azzia della Terza)의 도움으로 유명한 문인과 예술인들을 만나게 되고 그들로부터 최신의 마드리갈 경향을 배우게 된다. 그리고 빌라넬라(Villanella)라는 민간음악과 코메디아 델 아르테(commedia dell’arte)라는 즉흥 코미디 음악을 접하였고 이를 자신의 음악적 재료로 사용하였다.
  랏소는 플로렌스 출신의 대주교 알토비티(A. Altoviti)의 주선으로 1553년에 로마의 산 지오반니 디 라테라노 성당(St. Giovanni di Laterano)의 악장으로 임명되었고 그 이듬해까지 봉직하였다. 그리고 그의 후임에 팔레스트리나가 임명되었다. 음악을 아주 좋아하던 교황 율리우스 3세(Julius III) 밑에서 악장으로 일한 경험은 후에 랏소의 활동에 큰 영향을 주었다. 또한 이 시기에 랏소는 여러 사람들과의 토론을 통하여 현대적인 반음계와 정형종지법(Klauselbildung)에 대하여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조스캥의 제자 공베르(N. Gombert)의 작품에서도 영향을 받았으며 당시 이탈리아에서 마드리갈이 얼마나 열광적인 감동을 주는지도 경험하였다.
  랏소는 1555년 초부터 이듬해 가을까지 공직을 맡지 않은 채 플랑드르 지방의 안트베르펜에 잠시 머물렀다가 1556년에 신성로마제국의 바이에른 지역의 중심도시 뮌헨의 공작 알브레히트 5세의 궁정합창단(Hofkapelle)의 테너 가수로 임명되어 이주하였다. 랏소가 이 궁정합창단으로 들어오는 데는 궁내관(宮內官) 셀드(Dr. Seld)와 랏소의 후원자 푸거(Hans J. Fugger) 등의 도움이 있었다. 랏소는 1563년부터는 악장으로 임명되었고, 이 후 죽을 때까지 그 자리를 지켰다. 이 시기에 젊은 가브리엘리(G. Gabrieli)가 그의 조수로 일하면서 가르침을 받았다. 뮌헨에서의 활동을 통하여 랏소는 독일음악에 정통하게 되었고 이탈리아에서 배운 음악을 독일 음악에 접목시킨 작품을 많이 만들었다.
  뮌헨의 악장 시절은 랏소의 전성기였고 결혼과 귀족으로의 신분상승과 기사작위를 수여받는 일 등이 있어 가장 행복한 시기였다. 그는 1558년 바이에른 궁정 관리의 딸 베킹거와 결혼하여 가정을 이루었다. 1570년에는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막시밀리안 2세(Maximilian II)로부터 귀족의 작위를 받았다. 그는 1571년, 1573년, 1574년에 걸쳐서 프랑스의 왕 샤를 9세(Charles IX)의 초청으로 파리를 방문하였다. 그리고 1574년 봄에는 5개의 미사곡인 ≪파트로키니움 무지케스 제2권≫(Patrocinium musices, pars II)을 교황 그레고리우스 13세에게 헌정함으로써 교황을 직접 알현하는 기회를 얻었고 ‘황금박차의 기사’(Ritter vom Goldenen Sporn) 칭호를 받았다. 음악가로서 교황에게서 이 칭호를 얻은 사람은 랏소와 200년 후의 모차르트밖에 없다.
  뮌헨의 악장시절 그의 이름은 전 유럽에 유명해졌고, 사람들은 그를 ‘최고의 음악가’(musicus primarius; prince des musiciens)라고 불렀다. 잘 알려진 바와 같이 그는 이때 그의 고향인 플랑드르로부터 많은 음악가들을 뮌헨으로 데려왔다. 랏소는 1580년 이후에는 관직을 벗고 작곡에만 몰두했는데 주로 교회음악 작곡에 시간을 보냈고 1585년까지 5년 동안 그의 전체 작품 중 3분의 1을 만들어 낼 정도로 창작에 열을 올렸다.
  랏소는 다작(多作)의 천재 작곡가로서 23살 때 안트베르펜에서 최초의 작품집을 발표한 이래로 2,000곡이 넘는 작품을 남겼는데, 그의 사망원인인 우울증도 지나친 다작(多作)으로 말미암은 정신적 피로가 누적되어 생긴 것이라는 설도 있다. 랏소의 작품은 플랑드르어는 물론이고 이탈리아어로 된 마드리갈을 비롯하여 프랑스어로 된 샹송과 독일어로 된 리트 등 다양한 언어를 모두 포함하고 있다. 랏소는 위의 모든 언어를 자유롭게 구사하면서 가사의 정확한 의미를 파악하고 음악에 적용하는 놀라운 실력을 보여주었다. 샹송에서는 완전한 토박이 프랑스인처럼 생동감이 있고, 마드리갈에서는 완전한 토종 이탈리아인처럼 재치 있고 발랄하고, 리트에서는 완전히 독일인처럼 무게와 야성이 돋보이는 작품을 썼다는 평을 들을 정도로 그는 언어 구사와 음악적 표현능력에서 완벽하였다. 랏소는 작품의 국제적 감각이라는 면에서 후기의 헨델과 비교할 수 있고, 소년 시절부터의 천재성은 모차르트와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는 인물이었다.
  둘째 랏소의 작품은 교회음악과 세속음악을 망라하는 포괄성을 그 특징으로 한다.
  그는 교회음악뿐만 아니라 다양한 분야의 세속음악 작곡에도 큰 업적을 남겼는데, 이로써 그의 음악이 곧 16세기의 유럽음악이라는 등식을 낳았다. 그의 대표적인 음악장르를 살펴보면 700개 이상의 모테트를 비롯하여, 70개의 미사곡, 4개의 수난곡, 200개 이상의 이탈리아 마드리갈, 146개의 프랑스 샹송, 93개의 독일 리트, 101개의 마그니피카트, 32개의 찬가, 12개의 시므온의 노래(Nunc dimittis) 등이 있다. 이는 그의 창작적 열심과 저돌성의 산물이며 교회음악과 세속음악을 망라하여 당대의 모든 음악장르와 형식에 손을 댄 그의 넓은 음악세계의 포괄성을 보여주는 것이다.
  여기에서 주목할 것은 랏소의 교회음악과 세속음악 사이에는 장벽이 없다는 것이다. 그는 교회음악에서조차도 세속음악의 소재를 자유롭게 따다가 사용하였는데, 그의 미사곡을 ‘패러디 미사’(Parody Mass)라고 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그의 미사곡은 거의 대부분이 자신의 다른 작품을 패러디한 것이고 이 때문에 랏소는 교회음악인 미사곡을 다루는데 있어 너무 진지하지 못한 작곡가라는 오해도 받는다. 당시에 크게 유행하던 콘트라팍툼(contrafactum) 형식의 이 패러디 수법에는 선율이나 구성, 가사를 바꾸는 방법 등이 동원되었다. 그는 미사곡을 쓰는데 자신의 모테트에서뿐만 아니라 그의 샹송이나 마드리갈 같은 세속음악에서도 과감하게 차용하였다. 한편 그의 101곡의 마그니피카트 중 절반 이상은 그레고리오 성가의 선법을 존중하여 작곡되었지만 나머지는 세속음악 등에서 패러디한 것이다. 이러한 패러디와 더불어 그는 세속 음악적인 요소를 교회음악에 적극 도입하였다. 폭넓은 전조의 사용과 복잡한 리듬, 구시대의 정형적 작곡 방법의 탈피 등이 보여주는 것처럼 랏소는 음악의 틀 안에서도 교회음악과 세속음악의 장벽을 허물었다.
  랏소는 1555년에 베네치아에서 첫 번째 ≪마드리갈 작품집≫(Primo libro di madrigali)을 발행하였다. 같은 해에 안트베르펜에서 수사토(T. Susato)에 의해 출판된 ≪Primo libro dove si contengono madrigali, vilanesche, canzon francesi, e motetti≫라는 작품집에는 그 제목대로 마드리갈을 비롯하여 그의 빌라넬라, 샹송, 4성부 모테트 등이 포함되어 있다. 랏소의 첫 ≪샹송 선집≫(Tiers libre des chansons)은 1560년 루벵(Louvain)에서 출판되었고, 첫 번 리트 모음집 ≪새 독일 리트집≫(Neue teütsche Liedlein)은 1567년 뮌헨에서 만들어졌다. 그는 교회음악에 몰두하면서도 이후 계속하여 많은 세속음악을 작곡하고 작품집을 만들어 내는 등 음악의 성(聖)과 속(俗)의 경계를 자유롭게 넘나들었다.
  랏소는 세속음악을 많이 만들었으나 그의 음악의 중심은 역시 교회음악에 있었다. 그는 모테트 외에도 미사곡, 마그니피카트, 수난곡, 시므온의 노래 등의 여러 장르의 곡을 남겼다. 그의 미사곡은 예를 들면 ≪5 missae suavissimis modulationibus refertae una 5 reliquae vero 4v, concinendae≫(베네치아, 1570)라는 최초의 미사곡집과, 교황에게 헌정하여 기사 작위를 받은 ≪Patrocinium musices≫(1574)에도 들어있고, 1577년에 발행된 ≪Missae variis concentibus ornatae ab Orlando de Lassus≫에 거의 모두 들어있다. 수난곡으로는 ≪마태수난곡≫(Mathäuspassion, 1575)을 비롯하여 누가, 요한, 마가수난곡 등 4개의 수난곡집이 있다. 또한 최초의 마그니피카트 곡집에는 ≪magnificat octo tonorum≫(뉘른베르크, 1567)이 있고 101개의 마그니피카트 전곡은 1619년에 발행되었다. 그밖에 ≪시므온의 노래≫(Nunc dimittis, 1592)의 장르에도 다양한 작품을 남기고 있다.
  랏소의 최대의 업적은 모테트의 완성에 있다. 즉, 랏소의 음악 중심에는 모테트가 자리잡고 있으며 나머지 음악 장르에서는 그가 새로운 것을 개척했다기보다는 그의 독특한 개성과 재능으로 당시에 있었던 모든 음악장르를 심화시키고 높은 경지에 올리는 공헌을 했다고 볼 수 있다.
  그의 모테트 중 참회의 슬픔을 노래하는 ≪다윗의 참회 시편곡집≫(Psalmi Davidis poenitentiales modis musicis redditi... his accessit Psalmus “Laudate Dominum de coelis”, 뮌헨, 1584)은 불후의 명작으로 남아있다. 또한 그가 일평생 심혈을 기울인 모테트는 여러 작품집에 실렸는데, 가장 중요한 책은 516개의 라틴어 모테트 모음집인 ≪대음악전집≫(Magnum Opus Musicum)으로서, 이것은 그가 세상을 떠난 후 10년 뒤인 1604년에 아들에 의하여 빛을 보게 되었다.
  셋째 랏소는 모테트의 완성자로서 의미있는 업적을 남겼다.
  그는 모테트를 비롯하여 미사곡, 마니피카트, 시편곡 등을 작곡하였는데, 이중에서 특히 모테트는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는 거의 평생 동안 모테트를 작곡하는 일에 종사하였다. 랏소는 동시대의 팔레스트리나와 종종 비교되는데, 이는 두 사람이 가진 동일한 음악적 비중과 서로 다른 음악 성향 때문이다. 팔레스트리나가 신중하고 사려 깊고 고전적인데 반하여, 랏소는 저돌적이고 충동적 감정에 의한 개혁적 성향을 보인다. 이러한 성향은 특히 그의 모테트에서 잘 드러난다. 선율진행의 도약이 잦은 점, 악구의 불규칙한 길이, 리듬의 다양한 변화, 그리고 마치 세속음악과 교회음악의 경계를 허물고자 하는 듯한 자유로운 기질, 또한 이를 통해 가사를 극명하게 드러내어 표현하고자 하는 것 등이 그의 모테트에 나타난다.
  모테트를 알기 위하여서는 반드시 랏소라는 산을 넘어야 하는데, 이는 미사곡을 알기 위해서는 팔레스트리나를 거쳐야 하며, 칸타타를 알려면 바흐를 통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공식과도 같은 것이다.
  랏소는 모테트의 작곡가로서 15세기의 정신을 계승 발전한 위대한 거장이며, 이에 관한 한 당대의 팔레스트리나를 능가한다. 그는 15세기부터 전성기를 이룬 르네상스 모테트의 정상에 서있는 대가로서, 동시대 로마 악파의 팔레스트리나와 베네치아 악파의 가브리엘리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 중세로부터 발전되어온 모테트는 15세기에 이르러 고정선율의 지배가 약화되고 각 성부의 독립성과 균등성이 강조되기 시작하였다. 또한 라틴어로 된 예전적 가사에 각 성부가 일정한 간격으로 모방하여 동기를 발전시켰으며, 4-6성부의 합창곡이 주류를 이루고 있었다.
  15세기 모테트의 거장들로는 던스타블(J. Dunstable), 뒤파이(G. Dufay), 오케겜, 조스캥 등이 있다. 이들은 이탈리아 음악기법의 동원, 불협화음으로 여겨지던 3화음의 과감한 협화음 처리, 우아하고 서정적인 가요선율의 지향, 세속음악에서 교회음악에로의 과감한 선율 차용, 폴리포니의 비약적 발전, 정선율의 지배로부터 각 성부의 독립성과 균등성 확보, 베이스 선율의 비중을 높이며 대위법적인 기법 발전, 모방대위법의 확립 등을 시도하며 새로운 음악 스타일을 만들어냈다.
  랏소는 모테트 분야에서 15tpl의 선배들이 시도했던 음악 양식을 특유의 개성으로 발전 심화시켰다. 반음계적 선율, 언어와 음악의 완벽한 조화, 정형을 벗어난 불규칙한 리듬의 발전, 명쾌한 화성 창출 등의 전위적인 기법들이 그의 음악에 보이고 있다. 특히 랏소의 모테트에는 가사의 회화적 표현이 나타나고 있어 주목을 받는다. 가령 6성부의 모테트 ≪마지막 때≫(In hora ultima)에는 고정선율조차 없애고 모든 선율이 가사에 따라 자유롭게 작곡되어 있다. ‘마지막 때’(In hora ultiam)를 알리는 노래는 장엄하게, ‘모든 것이 사라지리라’(peribunt omnia)는 촘촘하고 빠르게, ‘나팔소리’(Tuba)는 이중합창으로 만들어 묘사음악적 성향을 보인다.
  랏소의 모테트 중 대표적 작품으로는 ≪시빌라의 예언≫(Prophetiae Sibyllarum, 1550), ≪두려움과 떨림≫(Timor et tremor, 1564), ≪옴니부스 레퀴엠≫(omnibus requiem quaesivi, 1565), ≪다윗의 참회시편곡≫(Psalmi Davidis Poenitentiales, 1584), ≪음악은 최상의 하나님의 선물≫(Musica Dei donum optimi, 1594) 등이 있는데, 폴리포니 양식의 든든한 대위법적 바탕 위에서 감정의 풍부함과 가사의 의미 전달을 강조한다는 측면에서 17세기초반의 바로크 오페라 음악의 태동을 예고하는 역할을 한다.
  랏소는 모테트에서 이중합창 기법을 즐겨 쓴다. 이는 그가 이탈리아에서 배운 것으로 성가대를 두세 개, 혹은 그 이상으로 분리하여 연주하게 하는 방법이다. 랏소는 또한 그의 모테트에 소위 연곡(Zyklus) 기법을 사용하고 있다. 예를 들면 그는 7편의 ≪참회 시편곡≫(Bußpsalmen)과 12개의 ≪예언곡≫(Sibyllen)을 썼다. 그 중 ≪참회 시편곡≫에는 시편 6, 31, 37, 50, 101, 129, 142편이 텍스트로 되어 있다. 랏소는 첫 번 시편곡에는 제1선법인 도리아 선법을 쓰고, 두 번째 시편곡에는 제2선법인 히포도리아 선법, 세 번째 시편곡에는 제3선법(프리기아)을 차례로 사용하면서 주도적 모티브 선율이 각 곡 사이를 연결하는 방식을 채택한다.
  랏소의 모테트는 이탈리아의 팔레스트리나(G. P. da Palestrina)와 가브리엘리(A. Gabrieli) 등에 영향을 미쳐 서정적인 선율, 풍부한 음색과 화성, 대위법의 심화와 이중합창기법 등을 가진 모테트의 발전을 가져왔다. 이러한 음악적 진보는 후에 초기바로크의 오페라 주역인 몬테베르디(C. Monteverdi)의 음악으로 연결된다.
  랏소의 제자 중에는 레흐너(L. Lechner), 라이너(J. Reiner), 에카르트(J. Eccard), 아이힝어(Gr. Aichinger) 등이 있다. 그밖에 젊은 가브리엘리(G. Gabrieli)는 랏소가 뮌헨의 궁정악장으로 있을 때 수 년 동안 조수로 그를 도우며 작곡기법을 배웠다. 그와 동시대의 거장 팔레스트리나는 랏소의 후임으로 로마의 산 조반니 디 라테라노 성당의 악장이 되었고, 랏소와 팔레스트리나는 1594년 같은 해에 세상을 떠났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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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일자: 2010.8.5
[문성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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